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초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은 한낮 볕이 따가워 오후 느지막하게 산책에 나선다. 스트레스도 풀 겸 해서 동네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산책길이다. 길게 뻗은 보도를 따라 풍경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면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아 즐겨 찾는 길이다. 아파트 길을 나서니 건물 꼭대기 위로 겹겹이 싸인 구름 너머 유난히 흰색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사이에서 점점 높아져가는 푸른 하늘을 보면 본격적으로 가을이 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심 내의 둘레 길을 한 바퀴 도는 산책길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주변이 잘 정비되고 가로수 그늘이 충분히 가려져 있으면서 풍경이 그런대로 괜찮은 산책코스가 주변 가까이 있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엔 도시 군데군데 빈 공터에 자투리땅을 이용해 소규모 공원이 설치되고, 또 테마 코스가 마련돼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동네 가까이에서 얼마든지 산보를 하고 휴식도 취할 수가 있다.

구청 길을 돌아 네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 선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건너편에서 아주머니가 빨강 신호등에도 아랑곳없이 건너오고 있다. 그 뒤를 따라 여학생 여러 명이 따라오고 남학생도 유유히 길을 건너오는데, 신호등 정지선에서 댓살쯤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서 있다. 필자 짐작으로는 아이가 신호를 지킨다기보다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빨강 신호등일 때 길 건너면 안 된다는 것을 교육시키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걷는 산책길 도중에는 네거리 신호등 몇 곳이 있다. 그 가운데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건널목은 차량 통행이 한산해 보행자들이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무단 횡단을 자주하는 곳인데, 그 앞에서 멈추어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빨강 신호등이 들어오면 그 자리에 멈추어서기. 이것은 누구든 자신의 안전을 위한 당연한 행동임에도 그렇지 못해 네거리에서 발생되는 교통사고가 예상외로 많다.

우리나라는 보행 중 교통사망자 수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단연 앞선다.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를 보면 OECD 평균이 1.4명이고, 유럽선진국이 1명 미만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4.1명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불명예와 교통사고 위험은 신호등을 무시한 차량 운행과 무단횡단이 원인인 바, 길을 다니다보면 신호등을 위반하는 운전자들이나 보행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볼 수가 있다. 교통질서를 비교적 잘 준수한다는 서울 시민에 대한 조사에서도 10명 중 4명이 무단횡단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하고 있으니 말이다.

산책하는 길에서 신호등을 자주 만나게 되니 필자에게 버릇이 하나 생겼다. 길 걷는 도중에 저 앞쪽의 푸른 신호등이 깜박깜박하면서 점멸신호로 바뀔 때에 종전 같았으면 걸음을 빨리해 건너가고 했지만 요즘은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추어 빨강 신호등이 오기를 맞추며 걷는다. 그리고서는 신호등 앞에 서서 보행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주로 아주머니들과 중고등학생들이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편이고 어린 학생들은 신호등을 잘 지키는 편이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이 바꿔지기를 기다리는 사이 불현듯 필자의 뇌리에서 시가 떠오른다. 필자가 시 공부하던 젊은 시절에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시전문지에 발표된 어느 시인의 시였으니, 전문은 생각나지 않고 다만 한 구절 외우고 있을 뿐인데, 빨강 신호등이 주제이다. ‘저 뒤통수를 때리는 빨간 눈알의 독재 앞에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는 시구가 강렬해 과거에도 어쩌다가 빨강 신호등을 대할 적마다 떠오르곤 했던 시구다.

시인은 빨강 신호등을 보면서 한 순간의 자유의 구속임을 토로했는 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하다보니 ‘빨강 신호등의 독재’가 잠재의식으로 남긴 시의 잔영(殘影)에서인지 모르는데 필자에게도 순식간에 그처럼 느껴졌다. 그 찰나에 신호등이 바꿔져 빨간 눈알은 푸른 자유로 회생됐으니 이번에는 푸른 신호등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됐던 경남 어느 곳에 살던 시인의 시였는데, 그 내용이 어슴푸레해서 필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다.

‘푸른 신호등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유의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발을 옮겨놓는다는 것인데…’ 이 시는 앞의 뒤통수를 때리는 빨강 신호등보다는 한결 여유를 느끼는 바, 그것은 ‘잠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난 자유가 주는 안도감에서다. 산책길에서 신호등을 보면서 그 표식들이 자유와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생각되긴 해도 교통질서의 소중함을 헤아리게 됐으니 가을 산책길에서 잠시간 허튼 생각을 하는 것도 또 하나 여유가 아닐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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