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정치권에서 ‘헌법 개정’ 단어가 또다시 입에 올랐다. 현행 헌법인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된 지 4반 세기가 지났으니 이야기가 나올 만한데, 꼭 시간이 흘러서 개정하자는 것보다는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중·대 선거구제도 도입, 대통령 임기 조정과 함께 권력 구조를 바꾸는 등 현재 우리나라가 처하고 있는 상황을 종합 고려해 현실에 맞고 국민 정서와 나라 사정에 어울리는 ‘좋은 헌법으로의 개정’ 목소리가 솔솔 나오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올해 초 국회에서 개헌론이 먼저 나왔다. 강창희 당시 국회의장은 ‘2014 신년사’를 통해 정치가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면서, 대한민국의 더욱 튼튼한 미래를 위해 개헌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는 말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그 후 의장 직속으로 ‘국회의장 헌법자문위원회’를 발족해 보고서를 마련했고, 여야 의원으로 구성된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에 148명이 참여하고 있는 실정인데, 최근 새누리당에서 개헌론이 재점화된 것이다.

여기에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도 화답하고 있으니 최근까지 금도로 여겨져 온 개헌 이야기가 서서히 불붙을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말기서부터 제기된 개헌론이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자 잠시 동력을 잃었다. 이유는 박 대통령이 정부 출범 후에 여러 가지 시급한 현안들이 많아 개헌 논의가 마땅하지 않다며 선을 긋고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인 바, 어쨌든 현재의 정치구도를 혁파할 수 있는 큰 틀 마련은 궁극적으로 개헌하는 방도라 여겨진다.

개헌이 정치 개선을 위한 큰 틀의 변화라면, 의원특권을 내려놓는 정치인들의 작은 변화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제19대 국회에서 여야 간 쟁투로 인해 현재 150일이 넘는 동안 ‘법안 처리 0건’이다 보니 정치권을 보는 국민은 비판과 분노에 싸여 있다. 정치권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변화가 우선돼야 하겠지만, 정작 정치인들은 기득권에 갇혀 스스로 변화할 생각 없이 제몫만 챙기려는 보신주의에 갇혀 있는 형세다.

국회가 정상 운영되지 않고 좌초를 만날 때엔 정당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 타협을 시도하고 대화로 꼬인 정국을 풀어나가는 게 지금까지 국회 내 풍속도였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나라 정당이 처하고 있는 한계는 정치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당 추진력과 야당의 행태가 오죽 답답했으면 대통령이 나서서 여당 지도부를 청와대에 불러 현안을 주지시키고, ‘의원세비 반납’ 운운까지 했으랴. 정당의 정치 개선 기여도나 정치결사체로서 정당의 존재는 무능에 가깝다.

정치인들이 그 모양이라면 정당의 지도부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모양새 좋게 이끌고 가야 하건만 정당들이 처한 현실이나 운영 사례를 보면 그 싹수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여건이 비교적 좋은 여당의 경우도 김무성 대표 체제 후에 지도부가 “청와대에 끌러 다니지 않겠다” “국민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겠다” “보수 혁신으로 건강한 정당의 기틀을 마련하겠다” 등을 약속했으면서도 국정 운영의 한 축을 책임 맡고 있는 핵심 정당으로서 리더십이 부족한 상태다.

야당은 지리멸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발표한 9월 셋째 주 정당 지지도에서 새정치연합은 지난주보다 2%p 오른 22%를 보이고 있는 바, 이 수치는 새누리당의 반 정도니 제1야당에 대한 국민 실망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또 정의당, 통진당의 지지도도 2∼3% 수준에 머무니 당원들만의 메아리로 그쳐날 뿐인데, 새정치연합이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의 힘에 바탕이 되는 대여전략 없이 보이지 않는 손의 암투로 허송세월을 보낸 탓이다.

정당 지도부가 비정상 운영이라는 비상 국면을 맞고 있어도, 당내 목소리는 정당의 건강한 재건보다 차기 당권 겨루기 각개 전투에 몰입하고 있다는 말들로 많다. 게다가 가장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당헌 개정을 적법 절차 없이 ‘금 나와라 뚝딱’ 식(式) 요술방망이를 휘둘러 ‘이 당헌은 비상대책위원회가 의결한 날부터 시행한다’는 당헌 부칙 제7호(2014. 9.21)는 당무위원회나 최고위원회의 의결을 결여한 것으로 앞뒤 사정에 맞지 않는다. 정당이 근원 없고 적법성을 구비하지 않은 채로 얼렁뚱땅하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여야 싸움판을 국민이 언제까지나 지켜볼 수 없는 터에, 립 서비스만 위민(爲民)이지, 편을 갈라 국민을 이용하려드는 나쁜 정치에 맛이 든 세력들에게 매섭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당이 정치 추진체로서의 사명은 좋은 정치로 국민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임을 깨닫게 해야 하고, 정치인의 근본이 국리민본(國利民本)에 있음을 일깨워줘야 하겠다. 국민을 핫바지로 아는 위정자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사이비 정치인들을 도태시킬 방도는 정치혁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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