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수컷 사자는 그의 가족과 일생을 함께하지 못한다. 늙어서 힘이 빠지면 자신이 군림하며 거느렸던 무리로부터 왕따가 되어 쫓겨난다. 그럴 때 그의 짝인 암컷도 그 짝꿍과의 사이에서 난 그의 새끼들도 그 수컷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렇게 쫓겨난 수컷은 열대의 초원 사바나(Savana)를 홀로 비실거리며 배회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시체는 초원의 청소부인 하이에나나 독수리의 밥이 된다.

이렇게 일생의 말로가 비참하고 초라한 사자를 사람들은 백수(百獸)의 왕이라 부른다. 정말이지 갈기를 휘날리며 초원을 내달리던 한창 때의 사자는 뭇 짐승들의 왕이요 지배자다. 그야말로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 사자도 늙어지면 생쥐 한 마리의 죽음이나 다를 것이 없는 초라한 죽음을 맞는다. 측은해보이기는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통하는 야생의 법칙이다.

사자는 짐승이므로 그렇다 치고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문명의 발달과 산업화는 사람을 사자와 짐승들이 사는 곳과 같은 야생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렇지만 문명의 발달과 산업화가 사람의 노년(老年)을 그것의 혜택으로 꼭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사람의 노년은 얄궂게도 늙은 수컷 사자의 처지와 비슷한 야생의 삶과 가까워지는 경우가 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따라 누구로부터든지 보살핌이 필요한 노년을 쓸쓸히 보내는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그 독거노인이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고독사(孤獨死)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가 됐다. 선진국 클럽인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것도 다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애처로운 노년의 독생(獨生), 독사(獨死)는 애초부터 일가친척 없이 혼자였거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가족을 버렸거나, 본인이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을 못해 외톨이가 되어 일어나는 일이라고 짐작된다. 어떤 이유든 지금은 자녀가 결혼하면 핵가족으로 분가해 노부모만 남고, 그 노부부는 자칫 황혼이혼을 결행하기도 하는 시대이므로 원천적으로 독생, 독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게 할 방법은 없다. 그렇더라도 이런 일을 막는 데 국가적 사회적 관심이 주어지지 않고 ‘첨단’을 추구하는 발전의 경주에만 열중한다면 그 첨단을 추구하는 경주가 모두에게 진정으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전장(戰場)에서 죽은 전우의 주검을 거두지 않고 팽개쳐 놓은 채 진격을 계속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노년의 독생, 독사 현상은 가족을 흩어지게 하는 현대문명산업사회의 우울한 그늘이다. 영농에 투입하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가급적 가족의 숫자가 많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모여 살아야 했던 농본(農本)시대에는 없던 현상이다. 그 농본사회는 가부장(家父長) 사회였다. 아버지가 가정 경영의 절대 권력을 가졌던 시대다. 그 때는 ‘여자의 일생’이 유행가 가사가 말하듯이 ‘눈물로 보낸다’고 할 만큼 기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엄밀히 말하면 부부 공동 경영시대라고나 할까.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고 뒷바라지 하는 머슴에 불과하다며 ‘남자의 일생’을 한탄하는 남자들의 자조(自嘲)가 많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소는 전통적인 가정 경영의 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든 독생, 독사는 여성 남성 가릴 것 없이 양성 모두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여성보다는 아무래도 밖으로 도는 터프(Tough)한 남성에게 더 많이 일어나는 현상 같다. 그가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거나 더욱이 돈까지 제대로 벌어다주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이사를 할 때 가족 모두가, 특히 아내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애견을 품에 안고 있어야 겨우 이사 가는 새집에 동승해갈 수 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정말 우스갯소리로만 들을 수 없을 만큼 남성의 자조가 심한 시대가 돼 버렸다.

사람의 수명이 수은주가 상승하듯이 슬슬 늘어나더니 급기야는 1백세를 넘나드는 장수 시대, 그로 인해 고령화 사회를 맞고 있다. 그에 따라 가족의 유대는 희박해지고 노부모를 외롭지 않게 모시는 윤리적 부양의 의무는 소홀해지고 있으므로 국가의 복지수요가 크게 증대한다. 국가가 가족의 윤리적 의무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노년의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다 해서 크게 느는 관련 복지수요 재원을 가족에게 구상(求償)하지도 않는다. 어떤 부모는 한탄하기를 ‘손자가 몹시 보고 싶은데 자식 며느리가 친정, 처가에만 뻔질나게 드나들지 시집, 본가에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장인 장모도 부모이므로 자식이 처가에라도 잘하면 크게 탓할 것은 없다.

자식과 며느리 덕이든, 사위와 딸 덕이든 노년의 진정한 행복은 가족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단란한 분위기와 소통, 애정의 교환에 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부모가 손에 쥔 재산에 따라 자식 며느리의 효심이 좌우되는 것은 세상의 풍조를 반영한다. 부부 간의 사랑도 그러하다. 따라서 형편에 따른 노년의 행복 편차는 사회의 양극화 그대로다. 그 극단의 음지가 늙은 사자의 말년과 같은 노년의 독생, 독사다. 그러니까 문명은 야생에서 멀어지며 앞으로 질주하지만 이 같은 노년은 거꾸로 늙으면 쫓겨나 외톨이로 죽음을 맞는 야생의 삶에 가까워지는 것 아닌가.

청년 백수가 없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장래와 행복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령 세대의 부양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젊은 취업자들에게 노령 세대가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 세대는 그들을 양육한 세대이므로 빚을 갚는 것이며 그 빚을 갚아야 그들도 늙어질 것이므로 그들의 뒤를 잇는 젊은 세대의 부담을 떳떳이 향유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이고 노 장 청(老 壯 靑)이 조화를 이루어 유지해가며 사는 사회다. 가족 단위에서나 사회 성원으로서나 노년이 쓸쓸하지 않고 젊은이들의 가정과 사회에 대한 기여가 고무되고 인정 받을 수 있어야 개인과 국민 전체의 행복이 극대화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젊은 날의 활력과 추억, 기억이 생생해지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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