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일본에서 천하통일의 영웅이라며 칭송하는 세 인물이 있다. 100년 이상 지속된 전국시대를 접고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원수를 갚고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들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이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라고 칭하기가 민망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즉 전범이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이 세 인물들의 됨됨이를 비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본받아 마땅한 모범으로 여기며 떠받들어 왔다.

일본인들은 그 세 명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최고로 친다.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럴싸한 말도 많이 남겼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며 떨어지기 마련이다.

과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한 말인지 그 진위가 분명치 않으나,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말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존 철학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딘다는 인내심이다. 일본인 경영자들이 가장 본받고 싶어 하는 인물이면서 가장 부하로 두고 싶어 하는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스타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 닛코의 도쇼구란 곳에 가면 마굿간에 새겨진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제 손으로 입과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산자루(三猿)라는 조각상도 있다.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견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에 대한 교훈을 알리는 것이다.

원래 원숭이는 재주 많은 동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간교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란 말이 단적으로 원숭이의 성정을 보여준다. 살림살이가 곤궁해져 하루 8개 주던 도토리를 7개로 줄이되,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펄쩍 뛰었다.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면 어떻겠냐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다며 박수를 쳤다. 상대를 속이거나 제 꾀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탓할 때 조삼모사란 말을 쓴다.

원숭이들의 이런 성질을 보면 왠지 일본인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눈과 입, 귀를 가린 산자루 조각상이 지금의 일본인들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사와 위안부 문제 등 당연히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일에도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일본인들은 산자루의 원숭이 조각상들을 바라보며 인내의 교훈 운운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못난 근성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경화 바람이 거세지고 그 틈을 타서 한국을 폄하하는 언론들의 선동이 도를 넘는다고 한다. 경제가 나빠지고 민심이 좋지 않게 되자 한국을 대상으로 터무니없는 선동질을 해대는 것이다. 우리가 그만큼 강해지고 한류바람으로 기운이 역동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의 증거랄 수 있겠지만, 잔꾀 많은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유쾌하지가 않다. 그들이 언제쯤 가린 눈과 귀, 입을 열지 두고 볼 일이다. 우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