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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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2022.12.16

 

<32> 간척사업의 역사적 유래

최우, 고종 25년 강화도 연안 수축

갈대밭에 쌓아 간석지로 개간

방조제 축조해 군량미 확보로 활용

 

아산의 창의적 일화 서산간척지 공사

폐선으로 거센 물길 흐름지연시켜

세계 최초 정주영식 공법으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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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정주영 공법’으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된 서산 방조제. 방조제 막바지 공사 중 거센 물살로 인한 공사 진행이 난항을 겪자, 아산 정주영 회장은 울산 조선소에 정박해 있던 폐유조선을 서산으로 견인한 뒤 이를 침몰시켜 물을 막는 창의적 발상을 실현시켰다.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지구상에 인류문명의 발생지는 강을 끼고서 발달했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농경사회에 맞춰 생활 터전 주변의 전답이나 임야 등을 개간해 필요한 식자재를 자급자족하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부족한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선 하천이나 강, 바다를 메꾸고 농업에 임하며 식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확보하면서 풍족한 문화생활을 유지해왔다.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간척 개발사업은 강화사(강화문화원, 1994년)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년)에 권신 최우는 각 고을의 일품군을 징발해 강화도 연안을 수축했다. 1248년에는 북방의 유민을 강화로 이주시켜서 황폐한 갈대밭에 둑을 쌓고 간석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한 것이 시초로 보인다.

그리고 고종 43년(1256년)에는 군량미 확보책으로 강화도에 제포(梯浦), 와포(瓦浦), 초포(草浦), 리포(狸浦)에 방조제를 축조해 각각 둔전을 삼았다.

 

◆韓선조들, 국난극복 수단으로 간척지 개발 

사기에는 이 해안 방조 제방을 방축(肪築)이라고 했고 조성된 간척 농지를 둔전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강화도에서는 지금도 이 방조제를 ‘성둑’이라 부르고 있고, 이곳에 외적을 막기 위한 성을 구축했다.

이런 배경에는 첫째로 몽고군이 원래 수전(水戰)에 약한 군대로 강화 해안에 토성을 쌓아 몽고군의 상륙을 방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둘째로 강화도는 조수의 간만 차가 커서(최대 8m) 간조시에는 광활한 간석지가 노출되기 때문에 제방으로 조수를 차단하면 농토조성이 용이하다는 입지 조건이었다. 몽고침략 기간 중 고려의 간척 개발은 강화도뿐만이 아니라 안북부(평안남도 안주) 청천강하구에서도 시행됐다.

이처럼 국난극복의 수단으로 시행된 간척지 개발은 한반도 서해안이 천혜의 간척 개발 지역이 됐고, 이런 흔적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알 수가 있다.

이씨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 때인 인조 14년(서기 1636년)에 시행한 감간포언을 비롯해 1660년 대청언, 1696년 장지언, 1706년 선두언, 1715년 선두중언, 1777년 사곡남부언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제방이다.

특히 조선시대 정종 시절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서는 기중기를 사용해 큰 돌을 운반하는 방법과 한조대를 만들어 조두(潮頭)를 막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예는 전남 신안군 안좌면 산두리의 간척제방이다.

또한 정조실록권 50을 살펴보면 “산 가까이는 제(提)가 있어 저수하고 들판 가까이에는 보(洑)를 두어 저수하고 바다 가까이에는 언(堰)을 두어 방수하니 제(提)보(洑)언(堰) 세 가지는 수공을 일으키고 한재(旱災)에 대비하는 것이다”라고 서술돼 지금의 저수지, 보, 방조제에 대한 기술적인 입지 개념이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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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풍차 마을’ 앞으로 아름다운 튤립들이 보이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간척지 개발 유명

해외에서 살펴보면 세계적인 간척 입국을 자랑하는 네덜란드는 10세기부터 간척을 시행했고,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제일 오래된 간척은 비후국대자사문서(1284년)와 비전국고성사문서(1288년)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표기된다.

해외에서 대표적인 간척지 개발 국가는 풍차의 나라로 유명한 네덜란드로서 전 세계에서 수면이 가장 낮은 국가이다. 국토 면적의 1/4이 실제로 해수면 아래에 있으며, 이에 따라 큰 폭풍우가 해안선의 수위를 높일 때는 국토의 많은 부분이 홍수 위험지역으로 됐다.

13세기에 사람들은 ‘터프(terps)’라고 불리는 인공 언덕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거 마을을 그 위에 위치시켜 홍수가 났을 때 그들의 거주집이 안전해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터프와 연결된 긴 벽(Dike라고 부름)으로 물을 농지에서 빼낼 수 있었다.

결국 네덜란드 사람들은 홍수 지역이었으나, 습지와 호수로 사용할 수 있었던 지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주변에다 건물을 건축할 수 있으려면 물을 배수해야 가능하므로 펌프를 이용한 풍차에 연결해 바람으로 구동시키는 지혜를 냈다. 이런 방식으로 네덜란드 국토는 경작할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풍차가 증가하면서 ‘풍차의 나라’로 불렸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튤립꽃이 유명한데 튤립은 17세기 아시아에서 도입된 이후 네덜란드 농부들이 잘 가꿔서 주 수입원으로 만들어 갔다.

또한 네덜란드는 농지가 부족하다 보니, 영토를 확장키 위해 20세기 들어서 바다에 맞닿은 국토를 넓히고 확보하기 위한 두 개의 프로젝트인 자위더르해와 델타사업으로 네덜란드 남부 도시 로테르담의 외곽 라인, 뫼즈, 스헬트 지역으로 이어진 인공 강을 만든다. 

비근한 예로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대부분이 간척지로 돼 있고, 한국이나 홍콩처럼 한꺼번에 하나의 영토로 개간 한 것이 아니라 섬을 여러 개 띄워 놓았는데 그 사이로 운하들이 운영돼 소위 ‘폴더’라고 하여 바다 위에 만든 크고 아름다운 땅들이 한둘이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간척지는 새크라멘토-샌죠아퀸 삼각주 지역으로 총면적은 3만ha이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 흐르는 샌죠아퀸 강의 합류 지역에 위치한 저지대로서 1500㎞의 자연 물줄기에 의해 100여개의 섬지대로 분리돼 있으며, 사람에 의해 축조된 제방들에 의거 조석이나 홍수로부터 보호를 잘한 간척지이다.

캐나다의 경우 펀디만 간척으로 펀디만에는 16세기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방조제가 축조된 것이 시초이다. 배수방식은 자연배수 방식으로 개수로를 통해 배수되었는데 이는 가을에 강우량이 집중돼(200㎜/일), 배수관로를 설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수문을 설치하고 제방을 높여 물 흐름을 차단시키면서 무난하게 간척됐다.

스페인의 간척사업은 과달키비르강 하구간척으로 13만 5000ha의 농지를 확보했다.

이 사업목적은 첫째로 매립에 의한 범람 방지, 둘째로 강우 배수와 관계용수공급 및 염분 제거시설 설치, 셋째로 농작물 생장에 필요한 수위 유지 및 지표 증발 방지, 넷째로 토양 유실 방지 등이다.

일본의 간척지 사업 하나 열거하면 나가우미 간척으로 나까우미에 약 2500ha의 대규모 간척을 시행하고 아울러 나까우미도의 잔수역 약 1만 5000ha를 담수화해 간척지와 연안지경지 약 7300ha의 농업용수를 확보해 신 농업정책에 박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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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2월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찾은 고 정주영 회장. (출처: 연합뉴스)

◆폐선을 물막이로 활용한 정주영의 창의성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었고, 혼자의 힘으로 현대그룹을 성장시켰다. 노년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애를 마감하고자 했고, 농업을 잘하려면 기존 농지를 개발하는 것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리아시스식 남한의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어야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정부의 허가를 받은 정주영 회장은 좁은 협만으로 형성된 서산 지역의 바다를 메꾸어, 농지로 개량하면 간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시행에 옮겼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마지막 구간의 바다를 메꾸는 데 수차례 실패를 거듭 겪었다. 하지만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는 정주영 회장 특유의 뚝심으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거센 바닷물 길을 막기는 어려우니, 울산에 고철로 팔기 위해 해체작업 직전의 폐선을 서산만으로 끌어오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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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서산농장. (출처: 현대서산농장 홈페이지)

이는 폐선을 활용한 정주영식의 공법으로 마지막 남은 구간의 거센 물길을 폐선으로 막아서 물길의 흐름을 지연시켰다. 그러면서 타이밍 맞게 산에서 캐어낸 큰 바윗덩어리를 덤프트럭으로 싣고 와서 한순간에 바다를 메워 물길을 잡는 세계 최초의 정주영식 공법으로 성공시켰다. 결국 서산만 일대를 농경지로 만들었고, 향후 이곳에서 경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경작한 농산물을 국민의 주식으로 활용케 했고, 서산농장에서 직접 키운 소를 본인 태어난 고향인 북한지역으로 보내는 성과를 냈다. 이런 성공은 정주영 회장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성과로 평가하고 싶다.

(정리=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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