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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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2022.10.20

 

<24>정주영의 88서울올림픽 유치

일본 꺾고 올림픽 개최 기대감 저조 

“창피만 당하지 마라”는 정부 훈령

鄭회장, 특유의 뚝심 행보 ‘군계일학’

 

전 세계 IOC 위원들 성향·취미 파악

집안 청소와 가사 등 도우면서 친분

 투표 결과 서울 52표, 나고야 27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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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30일 88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정주영 회장 등 서울올림픽 유치단들이 환호하고 있다.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제42회 세계사격 선수권대회(1978년 9월 24일~10월 5일, 세계 68개국 참가)를 서울 태릉국제종합사격장에서 아시아 최초로 개최한 대한민국은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후 사격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사격연맹 회장이던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불쑥 우리도 이제는 일본처럼 올림픽을 유치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또 1978년 10월 10일 정상천 서울시장이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대해 직접 발표했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정치 상황이 급변하자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올림픽 유치 계획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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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단.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 받은 정주영

이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최규하 정권이 포기한 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고 1980년 11월 30일에 IOC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서울올림픽 유치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신군부의 5공화국은 스포츠를 크게 장려(프로야구단 설립 등)해서 국민들의 정치 불만을 다른 각도로 돌리고 싶어 했다. 특히 올림픽에 대한 합당한 사유는 올림픽 유치가 서울시 차원을 넘어선 국가 차원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에 당시 정권의 2인자 노태우 정무장관이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인 유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올림픽 개최 회의론이 여론에서 들고 부각됐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기고 올림픽 개최권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한국의 IOC 위원이 단 한 사람 있었으니, 총회투표에서 고작 한 표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비판론의 여론이 있었고 차라리 일본에 양보하고 86아시안게임을 유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더 나아가 국무회의 주관자인 남덕우 총리는 올림픽 망국론까지 내놓았다. 왜냐하면 당시 돈으로 약 2조원 상당의 자금이 투자돼야 했기 때문이다. 종전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이 10억 달러 적자가 난 상황이었고, 88올림픽 경쟁상대는 1964년 동경올림픽을 개최한 경험이 있는 경제 대국인 일본의 나고야시로 일본은 1977년부터 일찌감치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왔다.

그렇지만 당시 5공화국은 IOC에 신청서를 냈기 때문에 철회하면 국가적인 망신을 당할 수는 있었고, 경쟁해 봐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생각에 정부 핵심 관계자는 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망신 대역으로 전경련 회장인 아산 정주영 회장을 호출하고 ‘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강인한 추진력과 번뜩이는 기치로 현대그룹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운 저력과 갖가지 신화를 남기면서 해외에 한국 기업의 위상을 높인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라고 쓴 위촉장을 수여했다. 요즘 풍자로 보면 독이 든 잔을 받은 정주영 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어쩔 수 없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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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유치 활동 당시 정 회장(맨 오른쪽).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일본 이용해 영국 IOC 위원들에 ‘눈도장’

당시 올림픽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정주영 회장이 서울을 떠날 때 받은 정부 지시 훈령이 “창피만 당하지 마라”였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에서도 ‘올림픽 유치 방해단’이 대거 현지로 파견돼 직간접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 대표로 한국을 떠날 때 영어 및 독일어에 능숙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현대중공업에서 차출해 같이 유럽으로 갔다. 정몽준 이사장은 통역 겸 수행비서 자격으로 동행했고, 출정식 때 결의에 찬 각오로 악수하면서 철나고 처음 부친 정주영 회장의 손을 잡아봤다고 회고했다.

정주영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내 사전에 실패는 없다”는 판단하에 유럽 출장 전에 현대그룹 수출 창구인 현대종합상사 전 세계 파견주재원들에게 미리 파악한 전 세계 IOC 위원들의 명단을 주면서 그들의 성향과 취미 생활에 대한 파악을 지시했다.

그리고 현지 주재원 부인들이 직접 IOC 위원의 집을 방문하고 집 안 청소는 물론 가사를 도우면서 친분을 쌓는 등 사전에 익혀갔다.

특히 정주영 회장 특유의 뚝심 있는 행보가 ‘군계일학’이었다. 유치위원들이 서독의 바덴바덴에 도착한 와중에 짬을 내서 영국 런던으로 출장 간 정주영 회장은 영국의 IOC 위원들을 만나 식사할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식사하는 자리에서 영국의 IOC 위원 중 한 명이 정주영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습니까”를 물어보자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국의 IOC 위원의 화답은 “초보자를 대한민국이 내보냈다”고 말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와중에 정주영 회장은 대뜸 “일본은 이미 1964년 동경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를 개최한 이후 경제 대국으로서 발돋음했고, 전 세계에 경제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나고야 유치가 결정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은 일본이 자랑하는 신간선 고속열차처럼 더 가속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직언했다. 이 말을 들은 영국 IOC 위원들이 갑자기 관심을 갖고 정주영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높였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가 일본의 급부상에 신경이 쓰였던 경제 대국 영국의 IOC 위원들의 마음을 한국으로 돌리게 했다.

그러나 비협조, 비판으로 일관했던 정부 기관 인사들이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좋은 결과가 발표되자 갑자기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종료 후에도 민간유치위원들이 아닌 정부 관리들만 줄줄이 훈장을 받는 것을 알아차린 정주영 회장은 매우 실망했다. 그리고 정 회장은 “반드시 짚어둘 숨은 얘기가 있다”면서 신문 지면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88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나는 단 1원의 올림픽 관련 수익 사업도 하지 않았고, 단 1원의 올림픽 시설공사도 하지 않았다”면서 “오로지 국가의 경제발전과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유치가 성공하도록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성공의 결과물은 정부 관리들이 독차지하고 그들만의 리그인 공로 훈장 잔치는 잘못된 행위”라며 경고의 쓴소리를 전 국민들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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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아닌 정성으로 IOC 위원들 마음 움직여

이제부터 바덴바덴 IOC 총회 개최 전에 북한의 험난한 위협과 경고를 받으면서도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긴 상황을 기술한다. 9월 하순의 제11차 IOC 총회를 앞두고 한국의 유치단은 9월 20일경 바덴바덴에 결집해 정주영 회장이 구심점이 돼 막바지 유치 활동을 펼쳐갔다. 평소 검소하게 살아온 정주영 회장은 특유의 돌격 정신력으로 최소한의 돈으로 큰 성과를 내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유명한 상표인 세이코 최고급 시계를 세트로 IOC 위원들에게 선물하면서 물량으로 공세를 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이와 반대로 돈(물질)으로 사람 마음을 사는 것보다 정성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이기는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매일 밤 IOC 위원들이 숙박하는 호텔 방에 현지 현대그룹 주재원 부인들이 밤새우며 정성으로 만든 고급 수제꽃다발 생화를 매일 바꿔가면서 준비해서 호텔 방 입구에 메모와 함께 놓고 갔다.

이 전략은 함께 투숙한 IOC 위원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고 남편인 IOC 위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대한민국을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이런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한국을 지지하는 IOC 위원들이 점차 증가한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정주영 회장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고 결의했다. 유치대표단의 활발한 로비활동과 한국전시관의 대성황에 이어 제안 설명회를 마치고 운명의 날인 9월 30일 아침이 되자 유치단 모두가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 있을 IOC 위원 투표를 앞두고 대표단 일부는 정주영 올림픽 유치위원장과 다 같이 점심을 했다. 당시 정주영 위원장은 대한민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믿었는데, 일부 여론조사에서 일본 나고야시가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고 나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회장은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으며, 중남미와 아프리카국가들의 몰표로 최소 46표는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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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 행사 모습.

운명의 그날 9월 30일 오후 3시 45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강한 악센트로 “쎄울(서울)” 결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투표 결과는 정주영 회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서울 52표, 나고야 27표였다.

발표 현장에서 유치단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고, 현지 중계를 본 대한민국 국민 전체도 기쁨의 눈물바다를 이뤘다.

지금도 일본과의 스포츠 경기는 극일 정신으로 무장해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피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흐르고 있기에 올림픽 유치에서 일본을 이긴 장면을 생중계로 본 필자도 환한 웃음과 기쁨으로 눈물을 글썽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났다.

대한민국도 올림픽 유치로 일본처럼 이른 시일 내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정리 = 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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