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image
ⓒ천지일보 2022.11.11

 

<27>2002 한일월드컵 유치 성공리

아산 자녀 중 유일한 서울대 출신

당시 이병철 회장 만나 자식 자랑도

 

1994FIFA 부회장 첫 도전·당선

집행위원들 별도로 만나 표심 공략

한국, 본선 경험한 축구 강국설득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 감독 영입해

학연·지연 무시하고 실력 위주 선발

스페인 꺾고 월드컵 4대성공

image
2010년 6월 17일 오후 2010 남아공월드컵 예선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맞아 서울광장에서 정몽준 전 한나라당대표가 경기를 지켜보며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출처: 뉴시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아산 정주영 회장의 여섯째 아들로 1951년 부산시에서 출생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해 정주영 회장 자녀 중 유일하게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정주영 회장은 타 대기업 회장을 만나면 정몽준 자랑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될 정도였다.

특히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을 만나면 삼성 가문에서 서울대학교를 입학한 자녀가 없어서 더욱더 정몽준 이사장을 우뚝 세우고 정 회장의 두뇌 우월성을 입에 침이 마르듯이 말하면서 이병철 회장의 기를 죽이곤 했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을 거쳐 미국 명문 MIT를 졸업한 정 이사장은 1993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박사학위도 취득한 영재이다. 군대도 ROTC 장교로 만기제대 한 후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에 올랐다. 사업보다 정치에 관심이 커서 국회의원 7선을 지냈다. 또 축구에도 관심이 커서 17년간 대한축구협회장과 FIFA 부회장을 거쳐 현재 명예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2002 한일월드컵’ 유치에 대한 칼럼을 기술한다.

image
정몽준(왼쪽부터) FIFA 명예 부회장·블래터 FIFA 회장·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2014년 6월 23일 오후(현지시각)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월드컵 FIFA 본부에서 만나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日, 경기장 등 모든 조건 韓보다 압도적

정몽준 이사장은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한 후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유치 작전에 들어갔다.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도 유치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월드컵 유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부 야당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월드컵 유치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며 반대했고, 정몽준 이사장에게 우리가 지금 월드컵을 유치할 형편이 안 된다고 노골적인 반대 의사도 밝혔다.

왜냐하면 일본은 우리보다 3년 일찍 1989년 12월 FIFA에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할 것이라는 의사를 공식 발표했고, 1990년에 월드컵 유치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일본에 유리한 의사를 자주 표방한 주앙 아발랑제 FIFA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사격을 받아 강력한 후보지로 급부상 중이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력이나 외교력, 경기장 및 숙박시설, 인프라 환경 등의 조건 모두 한국을 압도했다. 그래서 일본의 개최가 기정사실로 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당시 아발랑제 FIFA 회장이 브라질 출신이었다. 일본과 브라질은 당시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아발랑제 회장은 앞서 언급한 대로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했다. 그는 “나는 매년 휴가를 일본으로 떠난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와 대적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전쟁의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은 일본에 비해 축구경기장 시설의 인프라가 확연하게 노후돼 있다”는 등의 사유로 일본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이자, 브라질 펠레와는 숙명의 라이벌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한국의 월드컵 개최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라도나가 한국의 월드컵 개회를 지지한 이유는 브라질 사람인 아발랑제와 펠레가 일본을 지지해서다. 과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으로 나쁜 감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라도나가 대의명분 없이 그냥 한국을 지지한 것이다. 또 우루과이도 한국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칠레가 일본 지지를 선언하자 칠레를 싫어하던 페루와 볼리비아는 한국을 지지했다.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는 일본을 지지하면서 남미대륙의 집행위원들 표가 갈라졌다. 

image
2002년 6월 4일 부산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 D조 한국의 첫경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황선홍(오른쪽)의 선취골에 유상철과 최진철이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축구 최약최 日, 월드컵 개최 자격 無”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부친 성격을 닮은 정몽준 이사장은 차분하게 유치 준비에 전력하며 월드컵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FIFA 집행위원에 도전했다. 결국 정 이사장은 1994년 5월 FIFA 부회장에 당선됐고, 월드컵 유치에 자신감을 불태웠다.

그리고 전 세계 국가의 투표권을 가진 집행위원들을 별도로 만나 설득했다.

정몽준 이사장은 “일본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진출한 적이 없는 축구의 최약체 국가로서 그 실력으로 월드컵 개최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면서 “대한민국은 이미 4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경험한 축구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아발랑제와 맞서는 EUFA 유럽 축구협회 회장인 레나르트 요한슨이 한국의 의견이 합당하다며 한국의 편에 서서 지지를 시작했다. 또 정몽준 이사장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한국에 비교적 우호 관계인 북중미와 남미 일부 국가, 아프리카 국가들을 설득해갔다. 

정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축구 실력으로는 아시아를 대표할 자격이 충분하다”면서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일본이 월드컵을 개최하는 건 부당하다”고 설득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의 월드컵 유치 지지를 받은 정몽준 이사장은 이홍구 국무총리와 함께 세계 각국을 돌면서 외롭게 유치 활동을 펼쳤다. 이후 그는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 지원이 월드컵 유치에 큰 힘이 됐다고 서술했다.

또한 정몽준 이사장은 FIFA 회장인 아발랑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럽과 아프리카 집행위원들을 일대일로 만나 그들의 표심을 샀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한국이 아시아 최고의 ‘축구 강국’”이라고 어필하는 등 일본에 유리한 판세를 조금씩 뒤집었다. 

심지어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판단으로 정몽준 이사장은 아발랑제 회장 사무실을 직접 찾아갔다. 정 이사장 “남북한이 만약 공동 개최를 하게 된다면 2002년 월드컵 유치에 승리할 것이 틀림없다”고 ‘남북한 공동 개최’를 역발상으로 제안해 아발랑제 회장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이러한 한국과 일본의 뜨거운 월드컵 유치 경쟁이 일정한 선을 넘었고, 상관도 없는 남미 국가 간의 정치적 감정싸움으로 인해 월드컵 개최권을 두고 벌이는 유치전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분위기가 한국으로 유리하게 돌아갔다.

image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터키와의 2002 한일월드컵 3∼4위전을 마친 후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헹가래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88올림픽 유치한 부친에게서 많이 배워” 

결국 1995년 한국을 방문한 아시아축구연맹의 사무총장인 피터 벨라핀이 지나친 유치 경쟁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 양 국가들이 큰 상처를 입게 될까 봐 염려스럽다며 한국·일본의 공동 개최를 제안했다.

한국보다 빠르게 준비하던 2002 월드컵 개최를 한국에 빼앗길 가능성이 커지게 되자 일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공동 개최를 수락했다.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FIFA 본부에서 아발랑제 회장의 사회로 열린 평의회에서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그러나 한가지 숙제가 남아 있었다. 월드컵의 명칭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의 문제였다. 일본은 “알파벳 K보다 J가 더 앞에 있으니 JAPAN-KOREA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도 이에 굴하지 않고 “FIFA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의 줄인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에서는 한국을 KOREA가 아니라 ‘COREE’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J보다는 C가 앞서 있으니 당연히 KOREA-JAPAN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 갔다. 

결국 일본이 양보하면서 명칭은 ‘KOREA-JAPAN’으로 하는 대신 첫 경기인 개막전은 한국이 가져가고 결승전 경기는 일본에서 하는 것으로 극적인 합의를 보게 됐다.

그렇게 해서 2002년 월드컵의 공식 명칭은 ‘일한월드컵’이 아닌 ‘한일월드컵’이 됐다. 

정몽준 이사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최전방에 서서 열심히 노력하던 부친 정주영 회장을 뒤에서 조용히 도우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됐다고 했다. 당시의 소중한 경험이 ‘2002 한일월드컵’을 유치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고 학연과 지연에 약한 한국 사회의 기본을 무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위주로 선수를 선발해 혹독한 ‘히딩크식’의 훈련을 시행했다. 그 결과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은 월드컵 역사상 스페인을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했으며, 최종 성적은 4위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그 당시 길거리 응원인 ‘오 필승 코리아’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응원한 것이 아직도 필자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월드컵 10회 연속 출전’이라는 기록을 남긴 대한민국은 2022년 11월 21일부터 12월 18일까지 ‘열사의 나라’인 카타르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에 출전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이전 대회 우승국인 독일을 2대0으로 이긴 경험을 잘 살려 좋은 결실을 보기를 바란다. 또한 ‘축구공은 둥글다’라는 속어에 나오듯이 축구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것처럼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눈을 놀라게 하면서 결승전에 진출해 우승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길 앙망해 본다.

(정리=유영선 기자)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