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한족을 가장 괴롭혔던 이민족은 강족(羌族)이었다. 진(秦)대의 강족은 흉노의 지배를 받으며 중국의 서역진출을 방해했다. 한무제가 하서(河西)에 4개군을 설치하자 흉노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전한은 강족을 청해성 동쪽 황수(湟水) 이북으로 축출하여 하서의 통로를 유지했다. 서북으로 밀려난 강족을 서강(西羌)이라 부른다. BC 112년, 서강은 흉노와 호응하여 지금의 감숙성 일대를 침공했다. 이식(李息)이 이들을 물리치고 지금의 청해성 서령시(西寧市)인 임강(臨羌)에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주둔시켰지만, 강족은 흉노와 결탁하여 끊임없이 하서회랑을 차단했다. BC 61년 한은 근본적인 대책을 위해 조충국(趙充國)을 파견하여 전쟁을 서두르지 않고 둔전을 설치하여 장기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 전략이 주효하여 강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투항했다. 강족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한은 금성속국(金城屬國)을 설치하여 투항한 강족을 다스리면서 호강교위를 계속 주둔시켰다.

왕망의 시대에는 회유정책으로 서역지역이 안정되었다. 왕망이 망하자 강족이 다시 금성과 농서를 점령했다. 후한 건국 이전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외효(隗囂)는 광무제의 군대와 대결하기 위해 강족을 국경 안으로 끌어들였다. 외효가 멸망한 후에도 서북의 강족이 지속적으로 반항하자 광무제는 내흡(來歙)을 파견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듬해 마원(馬援)이 다시 강족을 대파했다. 그 후 강족은 내란으로 중국을 넘보지 못했다. AD 58년, 세력을 규합한 강족이 다시 대거 침입하자 마무(馬武)를 파견하여 대파했다. AD 77년에 다시 강족이 침입하자 이번에는 마방(馬防)과 경공(耿恭)이 그들을 물리쳤다. 강족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것은 마씨 일족이었다.

후대에 마등(馬騰)과 마초(馬超)가 강족에게 세력을 떨친 것은 이러한 인연 덕분이었다. AD 87년 강족의 침입을 막던 호강교위 부육(傅育)이 전사했다. AD 89년부터 AD 100년까지 3차례나 끈질기게 침입한 강족의 추장 미당(迷唐)이 전사하자 후한은 이 지역에 서해군을 설치하고 둔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족과 강족의 대결은 안제(安帝)시대에 벌어진 본격적인 투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후한시대에 한족을 괴롭힌 강족의 세력이 전한시대의 흉노보다 훨씬 강했다고 한다. 후한이 강족에게 시달린 것은 서북지역을 경시하여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족은 광대한 지역에서 유목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격파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강족이 한족과 투쟁하는 패턴은 항상 국경 안의 강족이 반란을 모의한 후 서강과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후한의 이민족 정책이 그만큼 서툴렀음을 의미한다.

AD 117년, 후한이 동강에서 선발한 기병으로 서역을 공격하자 강족의 호걸 마노(麻奴)가 서강과 연합하여 대규모로 침략했다. 후한은 등즐(鄧騭)과 임상(任尙)을 파견했지만 대패하여 강족의 세력만 키웠다. 대부분의 서북지역이 강족에게 점령되었다. 5년 후 간신히 진압했지만 강족의 소규모 공격은 계속되었다. AD 140년, 강족은 다시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후한이 파견한 마현(馬賢)은 이듬해 전사했다. 동강과 서강은 세력을 합해 수도 부근까지 약탈했다. 조충(趙沖)의 분전으로 강족은 후퇴했다. AD 144년 조충이 전사하고 강족도 크게 피해를 입게 되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AD 159년 서강이 침입했다,

후한은 단영(段穎)을 파견하여 서강을 대파하고, 국경 바깥 2천 리까지 밀어냈다. AD 167년까지 단영은 서강을 거의 제압했다. 그러나 동강은 연희 9년인 AD 166년, 선비족과 힘을 합쳐 무위(武威)와 장액(張掖)으로 침입했다. 장환(張奐)이 토벌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AD 169년, 단영은 동강까지 완전히 제압했다. 단영은 강족과 무려 180여 회나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강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후한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후한이 멸망의 길로 접어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환관과 외척의 발호, 농민기의, 무능했던 황제의 탓으로 돌렸지만, 사실은 강족의 끈질긴 침입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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