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상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면 기세부터 약화시켜야 한다. 강적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부저추신은 글자 그대로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냄으로써 끓는 솥을 식힌다는 뜻이다. 물이 끓는 것은 화력 때문이다. 화력이 강할수록 솥 안의 물은 격렬하게 끓는다. 끓을 때는 아무리 식히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아궁이에서 연료를 제거하는 것이다. 끓는 물은 위험하다. 그러나 연료 자체는 엄청난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지만, 그 자체를 위험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불이 붙지 않은 연료에 접근한다고 데이지는 않는다. 강한 힘을 감당하기 어렵지만 덜 위험한 연료를 제거하면 화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부저추신은 후한 말기에 정국을 뒤흔든 동탁(董卓)의 하진(何進)에게 올리는 글에서 ‘끓는 물을 멈추게 하려면 장작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북제(北齊)의 역사학자 위목(魏牧)은 ‘장작을 빼내어 물이 끓는 것을 멈추어야 하며, 풀을 베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명대의 척원좌(戚元佐)는 속담을 인용하여 ‘끓는 물을 멈추게 하려면 장작을 빼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청대의 문학가 오경재(吳敬梓)도 <유림외사(儒林外史)>에서 부저추신을 거론했다. 그렇다면 명대 이후에 부저추신은 민간에서도 유행하는 관용어로 정착되어 다양한 경우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회남자(淮南子) 정신훈(精神訓)>에서는 ‘탕약이 끓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해도, 일단 끓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 근본을 알아서 화력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회남자>의 작자는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사람이 욕망을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법을 이렇게 생각했다.
“욕망의 근본을 없애지 않고 욕망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고 하거나, 쾌락의 근원을 없애지 않고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닫으려고 하는 것은, 강의 근원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맨손으로 막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현은 욕망을 금하고 선(善)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 결과 사람들은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 형체와 성질이 비뚤어진다. 폭군은 홀로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악행을 저질러 나라와 사직을 망하게 했으며, 제 목숨마저 남의 손에 잃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문제의 관건은 사람의 욕망이 생기는 것과 그것이 넘쳐나는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솥 밑에서 장작을 빼내야 불길을 잡아서 탕약이 끓어서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을 없애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선동된 민중이 정치적 의도로 폭발하면 끓는 물보다 사납다. 500만 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명박은 요직에 대한 인사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라는 강풍을 맞아 휘청거렸다. 기업가와 행정가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그는 스스로 자백한 것처럼 정치적 수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정부와 여당은 권력을 잃은 좌파(?)와 반미주의자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매도했지만, ‘촛불’의 종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시청광장과 광화문을 메운 시위대는 솥 안에서 맹렬하게 끓고 있는 물에 불과했다.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장작 가운데는 정권교체에 공을 세웠지만, 인사와 총선공천에서 제외된 박근혜 지지자라는 장작도 있었다. 이명박은 아궁이에서 박근혜라는 장작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사코 끓는 솥에 찬물만 부었다.
피렌체의 지배자 코지모 디 메디치는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를 타도하려면 추방해야 하지만, 민중의 인기를 얻은 그를 함부로 추방할 수 없었다. 대안은 그를 민중의 지지와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새로운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도 ‘공화국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는 코지모를 권력기반인 민중과 차단하고 의회와 위원회에서 변론을 통해 공격했다. 결국 코지모는 실각되었고, 소데리니는 공화국과 자신이 공멸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지지는 다른 선동가에 의해 쉽게 바뀐다는 약점이 있다. 그의 반대파들은 추방된 코지모의 인기를 이용하여 역공을 펼쳤다.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려다가 실수로 기름을 붓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