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 보내준 성의를 생각하며 소제목 정도는 읽어보는데 내용은 언론에 난 글 가운데 이슈가 되는 사안을 편집했으니 그 사람이 시사에 관한 상당한 지식 정도나 시대정신이 잘 나타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아마 그분은 호남쪽 사람으로서 글을 쓰거나 언론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2일 보내온 글 중 몇 꼭지 중에서 ‘치열했던 의병활동 재조명 계기로’라는 소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호남이 없다면, 이 나라 조선도 끝이 나는 것이요, 함께 싸웁시다. 결코 우리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나라가 위태로워진 지경에 처했다. 외세의 침략에 호남이 들불처럼 봉기하고 나섰다. 너나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군대를 조직했고, 목숨을 바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국난 극복의 상징이며 특유의 애국·애족·애향정신의 발현이다. … 나라 구하기에 기꺼이 칼을 들었던, 또 곡괭이와 낫, 호미까지 앞세웠던 호남민이다. 조선말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에도 수많은 민초들이 항거했다.…”

짐작컨대, 아마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의 70갑자(420년)가 되는 지난해에 쓴 글 같기도 하다. 그 내용은 임진왜란 항쟁과 고경명 선생의 전국의병 제창 이후 항일독립운동과 5.18을 전후로 한 전국의 민주화운동 등 호남이 ‘구국의 보루’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글을 읽고 나니 그저께 방송사에서 재방된 본격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이 클로즈업되어 온다.

역사 드라마에 관한 평소의 생각은 큰 줄거리는 그 시대의 사조와 대체로 맞겠지만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하여 정사(正史)로 확인되지 아니한 이야기들, 작가의 상상력이 기반이 된 사실성에서 벗어나 역사를 왜곡시킨다는 우려를 해왔던 터이다. 그렇지만 왕조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기억에 생생한 편이어서 관심을 끈다. 제5공화국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다룬 MBC의 야심작 ‘제5공화국’은 2005년 4월부터 9월 중순까지 방영하여 시청자의 관심이 매우 컸다. 다시 봐도 여러 가지로 시사점이 많은 드라마였다.

그저께 드라마 분은 광주의거를 유발한 전남도청에 대한 계엄군의 접수 상황이 펼쳐지는 내용이었다. 도청을 지키던 학생들과 시민군들은 계엄군들의 도청 진입이 임박했다는 상황을 전해 듣고서 자발적인 참여를 결정한다. 가족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도 좋고,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사수할 결의가 된 사람들은 힘 모아 도청에 남아 계엄군 진입을 막자는 대목이다. ‘아침 이슬’ 노래를 부르며 도청에 남아 끝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하자던 젊은이들은 끝내 계엄군들에게 진압되고 만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과연 젊은이들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인지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그때의 상황들이 처연한 울림을 준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했던 광주의거가 일어난 지 벌써 33년이 지났다. 80년 5월 당시 광주의 소식은 언론이 통제 당했고, 통신마저 두절되어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던 시기에도 전남도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 있었으니 바로 내무부(현재의 안정행정부)의 행정전화였다. 당시 필자도 정부종합청사에서 행정전화로 도청 공무원과 시민들과 수시로 통화를 했던 적도 있다.

전화를 걸어 그쪽 상황을 알아보면 도청을 지키던 소위 시민군들은 평온한 가운데 전화 응대를 친절히 해주었고, 필요한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다. 마치 사무실에서 평온무사하게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는 분위기라는 이야기다. 33년이 지난 지금 필자가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을 계엄군들이 진압하던 장면들이 크게 클로즈업되면서, 적어도 그들은 폭도들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고, 지역을 아끼며, 민주주의를 누구보다 걱정하는 애국시민들이었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사실과 다를 수 있겠지만 ‘제5공화국’의 역사 드라마는 그 당시의 군부 세력의 권력욕에 대해 비교적 생생하게 다룬 내용이다. 그들에 희생된 시민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제5공화국’의 실세들은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많은 시간을 절대 권력과 호강 속에 보낸 기간 동안 직접 또는 간접적인 피해를 당하며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았던 국민의 한은 클 것이다. 더욱이 민주주의를 지키려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렸던 의로운 사람들의 값진 희생은 33년의 세월에 묻히면서 점점 잊어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영국의 재상, 처칠이 한 말이다. 오래 전에 방영된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을 당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정치군인들에 대한 단죄가 된 시기에 다시 보니 필자는 생각나는 게 많다. 정치적 후진성이 초래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정치군인들의 창궐도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고, 정치인들이 국민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단견에서 기인됐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은 생생한데, 재방영되는 ‘제5공화국’ 드라마를 흥미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국민의 피를 먹고 자라난 민주주의를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훼손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