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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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은 영국을 대리한 일본이 러시아와 벌인 ‘0차 세계대전’이었다. 1905년 5월 27일에 일본연합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키자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재정이 고갈된 것이다. 러시아도 반정부 시위가 확산돼 짜르 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강화를 먼저 요청한 쪽은 일본이었다. 5월 31일에 주미일본공사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이러자 루스벨트는 중재에 나서 8월 9일에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규모 아시아 순방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7월 5일에 육군장관 태프트를 비롯해 상·하원 의원, 대통령 딸 앨리스 등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순방지는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그리고 대한제국이었다.

7월 27일에 태프트는 도쿄에서 가쓰라 수상과 밀약을 맺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요지는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를 보장받고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 이익을 확보했다.

(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됐으니 고종이 알 리 없었다.)

한편 8월 12일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1905년 3월 24일에 영국은 일본에 1902년 1월에 체결된 제1차 영일동맹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3월 27일에 일본도 찬성했다. 영국은 5월 17일 “현재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강화하고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당시는 발트함대가 아시아로 오는 중이어서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5월 26일에 일본 측 안이 영국에 전달됐다. 여기에는 제1차 동맹의 “청국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조항이 삭제되고 “영국은 일본의 한국에서의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의 옹호·증진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감독·보호 조치를 취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10월 4일 자 일본 ‘고쿠민(國民)신문’은 “영일동맹은 사실상 영–미-일 동맹”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이 우리 동맹이 됐을 때 미국은 그 동맹의 일부가 됐다.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연합을 주장하지 못할 뿐 일본은 공식적인 조약이 없더라도 미국이 우리와 동맹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줄곧 러시아에 의존했던 고종은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하자 미국이 1882년 5월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에 의거 대한제국을 도와줄 것으로 믿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는 이렇다.

“미합중국 대통령과 조선 국왕은 그들의 신민과 더불어 영원한 평화와 우호가 계속될 것을 기약한다. 만약 제3국이 조선과 미국 한쪽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거중조정’ 조항은 통상수호조약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조항이었다. 1883년 11월에 체결된 한영수호통상조약 제1조에도 명시돼 있다.

“제1조 (2) 체약국의 일방국과 제3국 간에 분쟁이 발생되는 경우에 청을 받은 타방은 이의 원만한 타결을 보기 위해 조정에 노력한다.”

그런데 고종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에겐 매달리지 못하고 미국에 매달렸다. 고종은 미국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을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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