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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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오전에 미국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육군 중장이 인천항에 입항했다. 입항 하루 전인 9월 7일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포고령 제1호와 제2호를 발표했다. 포고령 제1호는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했고, 포고령 2호는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

9월 9일에 미군은 서울로 진주하여 군정을 선포했다. 이 날 오후 4시 30분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이윽고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조선 통치를 미국에게 이양하는 항복 조인 문서에 서명하였다.

9월 12일에 하지는 육군소장 아놀드를 군정장관, 헌병사령관 육군 준장 로렌섬을 경찰책임자, 육군 소장 키량프를 서울시장에 임명했다.

9월 17일에 미군정은 ‘정당은 오라’는 성명서를 통해 정당 신고제를 실시했다. 1개월 사이에 40~50개의 정당과 정치단체가 생겼고, 11월 1일 현재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과 정치단체가 무려 205개나 됐다.

이러자 ‘개나 소나 다 정당을 만든다’는 조롱 섞인 말이 유행했고, 미국인들은 수많은 냉소적 논평을 했다.

한 미군정 관리는 “한국인들은 식사하려고 두 세 명만 모이면 정당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또한 두 사람이 모이면 3개의 정당을 만든다는 말도 생겼다. 두 사람이 각각 정당을 하나씩 만들고, 두 사람이 합쳐 정당 하나를 만든다는 말이었다.

10월 10일에 아놀드 미군정 장관은 신문 기자회견 석상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해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이어 아놀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꼭두각시들의 연극이요 일종의 사기극’이라고 규정하면서, 인공지도자들은 어리석고 타락한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한국의 합법적 정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바보스럽다’고 조롱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p91~95)

더욱이나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적 그룹이며 소비에트 정치운동과도 모종의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봤다(하지 중장이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1945년 11월 25일의 보고서).

당시 남한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활동했다. 우익세력으로 송진우와 김성수가 중심이 된 한국 민주당과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그리고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이 있었고, 중도 세력으로는 우익적인 안재홍의 국민당과 김규식 중심의 민족자주연맹, 좌익적인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당과 백남운이 중심이 된 남조선 신민당이 있었다. 좌익 세력으로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20일의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란 글에서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이 가장 주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이라고 역설하면서, 조선 혁명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조선 공산당 만세, 중국 혁명 만세, 만국 푸로레타리아의 조국 소련만세, 세계 혁명운동의 수령 스탈린 동무 만세를 외쳤다(류승렬 지음,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 현대, 2003, p2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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