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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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의 간접통치

1945년 8월 24일에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에서 ‘조선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남한의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북한 정치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8월 26일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장에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 현준혁이 맡았다. 평안북도는 8월 27일, 함경남도는 8월 30일, 황해도는 9월 8일에 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돼 행정권을 장악했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2004, p52).

하지만 소련은 제25군 사령부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을 둬 정권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했다(안문석 지음, 북한 현대사 산책 1, 2016, p 29).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한편 소련군은 8월 26일부터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했다. 전화 통신,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것을 다 끊었다. 다만, 북한 사람들의 남한으로의 이동은 한동안 모른 척 했다.

#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8.15 해방 후에 이 말이 유행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속았다. 소련군은 강간과 약탈 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마오제’였다(마오제는 함경도 사투리로 ‘막 굴러먹은 놈’이란 뜻).

김학준은 ‘북한 50년사(1995년)’에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다. 거지 떼 모양의 소련군은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아무것이든 빼앗았다. 그들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일본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낮에도 당했다. 마침내는 야밤에 조선 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강준만 저, 위 책, p54).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으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적었다(강준만 지음, 위 책, p55).

그런데 소련군은 개인적 만행뿐만 아니라 점령군 차원에서 착취도 심각했다. 소련군은 북한의 주요 물자와 시설을 소련으로 반출해갔다. 북한 전체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본 것이다. 동유럽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랬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함흥과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공작기계와 방직기계, 전동기 등을 가져갔다. 9월에 소련은 평양 고무공장의 기계를, 10월에는 수풍발전소에 있던 10만 kw의 발전기 3대를 뜯어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려던 발전소 기술자가 소련군의 총에 맞는 사고도 발생했다.

쌀도 대량으로 반출했다.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을 가져갔다. 이외에도 소련군은 1945년에 소 15만 마리, 말 3만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반출했고, 1946년에는 소 13만 마리, 말 1만 마리, 돼지 9만 마리를 소련으로 가져갔다. 심지어 소련군은 1946년 1월 1일에 철도 시설을 경비하는 부대인 철도 보안대까지 창설했다(안문석 지음, 위 책, p 25~27,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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