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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응집(金應集)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출감했으며, 5년 이후 1925년 3월 신흥우(申興雨)의 자택에서 이상재(李商在), 구자옥(具滋玉)을 포함해 기독교 유력 간부 9명이 모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가 결성됐다.

이와 관련해 흥업구락부의 설립 취지가 표면상으론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민 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에게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는 비밀결사조직(秘密結社組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체에 김응집이 참여했다는 것인데, 그는 1925년 8월 1일 열회(列會)에 참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김응집은 1927년 2월 국내에서 조선일보계(朝鮮日報界), 기독교계(基督敎界), 불교계(佛敎界), 조선공산당계(朝鮮共産黨界)와 연계해 결성된 독립운동(獨立運動)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서도 활동했다.

구체적으로 김응집은 동년(同年) 11월 7일 신간회 본부의 준비위원회 서무부 부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경성지회의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경성지회 사무를 관장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한편 1930년대 전반에 신흥우의 주도로 결성된 단체가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이었는데 김응집은 이 단체에도 참여했다.

이 단체에는 YMCA 내부의 신흥우 측근과 그가 속한 감리교단(監理敎團)의 정춘수(鄭春洙), 박연서(朴淵瑞), 심명섭(沈明燮) 등의 목회자(牧會者)들은 물론 함태영(咸台永), 전필순(全弼淳), 최석주(崔錫柱) 등 장로교단(長老敎團)의 목회자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당시 개신교단(改新敎團)의 주류였던 미국인 선교사들과 평안도 장로교계의 정교분리 또는 근본주의 신학 중심의 가치관에 비판적이었으며 정치, 경제, 사상적인 측면에서 고전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김응집의 생애를 미력하게나마 5회에 걸쳐서 살펴봤는데, 그는 그동안 전혀 모르던 독립운동가였으나, 사동궁(寺洞宮)의 간호부(看護婦)로 활동하였던 최효신(崔孝信)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 1922년 5월 9일자 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덧붙이면 사동궁의 간호부 최효신과 김응집의 부인 최효신이 동일인물(同一人物)인지 여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끝으로 김응집은 1937년 5월 2일 향년(享年) 42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으며, 2008년 건국포장(建國襃章)에 추서(追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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