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와 ‘극명한 대비’
콘크리트 바닥 곳곳에 얼음
난간 없는 하수로 ‘위험요소’
“코로나에 후원이 거의끊겨”
“전염병 무서워 병원 못 가”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이우혁 인턴기자] “연탄 때고 전기장판을 켜면 지낼 만은 한데, 전염병 때문에 후원도 다 끊겨 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이어 영하 10도의 한파까지 밀어닥쳤다. 꺾이지 않은 코로나19 확산세에 ‘엄동설한’으로 이중고를 겪으며 서민들의 마음도 얼어붙는 가운데 지난 4일 서울 강남에 마지막 남은 판자촌인 ‘구룡마을’을 찾아가 봤다.
◆지붕 위엔 방수천이 ‘누덕누덕’
서울역에서 406번 버스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구룡마을 뒤편으로는 왕복 10차선 도로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면 눈앞에는 같은 강남이라는 것이 의심되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철거민은 개발의 장애물이 아닌 피해자’라고 적힌 붉은 현수막이 긴장감을 자아냈다.
도로에선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걸어서 3분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를 의심케 하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 위엔 한기가 스미지 않도록 파란색 방수천이 누덕누덕 발라져 있었고, 그마저도 그 위에 벽돌을 얹어 어설프게 마무리돼 있었다. 수십여 가닥의 전선이 전신주 하나에 엉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건조한 날씨로 마른 폐기물들이 곳곳에 버려진 골목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길고양이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열악한 거다, 이게 어디 삶인가”
마을 어귀에선 ‘수원’이라는 호(號)를 사용한다는 한 할머니(75)를 만났다. 코로나19에 한파까지 겹친 상황에 대해 수원 할머니는 “사는 게 우습다”며 자조했다. 자조의 이유를 더 묻고 싶었으나, 할머니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중천인 오후 2시에도 구룡마을 골목은 어둡고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피복이 군데군데 드러난 전선과 줄로 묶어놓은 지붕들이 이곳의 처지를 설명해줬다.
길 가운데에 하수로가 있지만, 난간이 없고 폭이 좁아 위험 요소가 다분했다. 골목 주변에는 죽은 풀들이 널려있었고, 콘크리트 바닥은 곳곳에 얼음이 얼어있었고, 걸을 때마다 깨진 파편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집 문을 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이금자(가명, 80대) 할머니는 “한파인데 문이 고장 나 이젠 잘 닫히지도 않는다”며 “열악한 거다. 이게 어디 삶인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을 건물 대부분이 제대로 지어진 건축물도 아닌 데다 주민 개인이 임시로 보수해놓은 터라 어설픈 모습이었다. 지붕 위에 겹겹이 쌓인 파란 방수포를 보면 강풍에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겼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 고충도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즐거움은 구룡마을 주민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들에게서 이러한 즐거움을 앗아갔다.
옷자락이 해진 낡은 누빔조끼를 입은 박순자(가명, 80대) 할머니는 “그전엔 노래 교실도 다니고 산악회도 다녔다”며 “요즘엔 집에만 있는데, 사람들을 못 만나 힘들다”고 한숨을 쉬었다.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린 박 할머니는 “매일같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으니 사람이 멍해진다”며 “밖에도 못 나가고, 병원에 가고 싶어도 웬만해서는 잘 안 간다”고 코로나19로 인한 고충을 얘기했다.
그는 “필요한 걸 얘기해도 어차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생활이 이렇다고 누가 날 도와주겠는가”라고 회의감을 내보였다.
◆“주민들에 좋은 일 생겼으면”
처음 보는 취재진을 반갑게 맞은 김자현(가명, 80) 할머니는 대뜸 마스크를 확실하게 챙겨야 한다며 코로나19를 조심해야 한다고 연신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연탄 때고 전기장판을 켜면 지낼 만한데, 코로나19 때문에 후원도 다 끊어져 간다”며 “어려움이 많다. 전염병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서워서 병원도 못 간다”고 말했다.
하얗게 변한 연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빛바랜 흰색 의자에 앉아 그동안의 심정을 토로했다.
제일 힘든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해결해 줄 거냐고 물었다.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는 취재진의 답변에 김 할머니는 웃음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구룡마을이지만 김 할머니에겐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이다. 할머니는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 이 동네”라며 “아침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들 친절하다. 그리고 굉장히 순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동네를 걸으면서 김 할머니는 “주민들한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멀어져가는 취재진을 향해 김 할머니는 굽은 등을 조금 펴며 조심히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