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3)
[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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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에 있는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백산 안희제 흉상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백산 안희제 흉상

◆ 마지막 국외활동, 발해농장

이후 안희제는 1933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을 만들어 국내의 농민을 이주시키고 정착시켰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했으나 실제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이자 대종교의 활동지였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 운동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자금 조달 또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안희제가 있었던 영남지역의 농민들이 대다수를 이뤄 농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이뤘으나 이후에는 함경도·평안도·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안희제는 이주농민과 그 2세들에게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교육하기 위해서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됐다. 민중 계몽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종교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이전시키면서 교주 윤세복과 아들 윤필한 등 대종교의 간부들은 대동청년당에 들어오도록 했다. 대종교는 나철이 만든 민족 종교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관계가 되어 있는 종교였다. 그랬기에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대종교포교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활동지를 옮긴 대종교는 만주에서 교세를 확장했고 1914년에는 교도수가 30만여 명에 달했다. 일제는 밀정을 통해 감시를 하다 1942년 임오교변을 일으켜 교주 윤세복을 비롯해 21명의 대종교 간부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고 대종교총본사의 각종 비품과 서적을 압수했다. 안희제도 이때 함께 검거가 되면서 고문을 받게 됐다.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이 1943년 5월부터 1944년 1월 사이에 모두 순국하게 되는데 이를 ‘임오십현’이라고 불렀다. 안희제 또한 이 사이에 사망하면서 임오십현 중 하나에 속한다. 1942년 11월 19일에 잡힌 안희제는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3시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순국하게 됐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에 전시된 임오십현 순교실록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에 전시된 임오십현 순교실록

백산 안희제는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함께 ‘3백’으로 불렸다. 하지만 백범, 백야에 비해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 그 이유 중에는 그의 자료가 너무나 적은 탓도 있을 것이다. 백산기념관에서 만난 그의 후손인 백산 안희제 선생 기념 사업회 안경하 이사는 “백범, 백야 선생과 함께 우리 할아버지는 매우 훌륭하신 분”이라면서 “이렇게 좁은 공간에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이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방의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신문학에 깬 안희제. 그는 교육·경제·언론·종교 등 다방면으로 많은 이들을 깨우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을 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밝았던 그는 본인을 드러내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에 쓸 자금줄을 마련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 일한 독립 운동가였다.

안경하 이사는 “본인이 일제에 잡히면 자금줄이 끊겨 임시정부에 피해가 갈까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신 분”이라면서 “망명하기 전 혹여나 일제에 책잡힐 것을 염려해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가셔서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사리에 밝았던 안희제는 분명 자신을 드러내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드러내어 홍보를 하려고 하는 지금의 어떤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기업인의 행보였다. 이는 분명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위한 공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기념관은 부산 중심에 있는 중구에 위치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하는 남포동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니 한 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만 전시관이 협소해 지하에서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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