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유림외사는 청대의 소설가 오경재(吳敬梓 1701~1754)의 작품이다. 안휘성 전초(全椒) 출신으로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관료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대대로 전초의 세족이었다. 오문연(吳雯延)의 아들이었으나 종손 오림기(吳霖起)의 후사를 이었다. 남경 오경재고거에는 서법가 초한(肖嫻)이 79세에 쓴 대련이 있다. 유관을 쓰고는 천만금을 못 지켰지만(儒冠不保千萬産), 소설 한 권만은 오랫동안 이름을 전한다(稗說長傳一部書)는 뜻이다. 그의 삶을 적절히 묘사한 글이다. 오림기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라고 닦달했으나 오경재는 형식적인 공부보다 문학과 음악을 좋아했다. 13세에 모친이 병사하자 하루 종일 문학작품을 읽었다. 폭넓은 독서로 축적된 자료는 훗날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희53년(1714), 오경재는 강소 감유현학교유로 임명된 오림기를 따라갔다가 감유의 해변과 명산을 찾아다녔다. 16~17세 무렵, 고향 전초로 돌아와 결혼하면서 다시 소설과 희곡에 빠졌다. 생부 오문연이 사망했을 무렵 수재시험에 합격했다. 얼마 후에는 오림기도 사망했다. 유산 쟁탈전이 벌어지고 아내까지 사망하자 오경재는 남경으로 이주했다. 가세는 이미 크게 기울었다. 이 시기에 그는 33세였다. 가난했지만 그는 끝내 고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문인들은 그를 맹주로 추대했다. 한 푼도 없는데, 뱃속에서는 천둥이 울렸다. 겨울에 기온이 떨어지면, 친구와 성을 돌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난족(暖足)이라고 불렀다. 건륭19년(1754), 54세의 오경재는 강소 양주로 친구를 찾아가 통음하며 당의 장호(張祜)가 지은 종유회남(縱游淮南)을 몇 차례 읊었다. 며칠 후 장남 오랑과 동년배인 시인 왕우증과 만나 술을 마신 후 갑자기 사망했다. 친구들이 돈을 빌려서 안장했다. 오경재는 평생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그의 명성을 높인 것이 장편풍자소설 유림외사이다. 이 소설은 20년이 소요돼 49세에 완성했다. 이 소설에서는 과거제도의 병폐를 폭로하고, 사대부의 각종 추태를 묘사하며 당시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추락을 폭로했다. 강력한 필체로 과거제도로 부패한 독서인, 허위로 가득한 가짜 명사를 그려냈다. 명대를 가탁했지만, 당시의 사회상이다. 연결된 고사와 인물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앞뒤로 호응한다. 이미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와 같은 백화장회장편소설이 있었지만 유림외사의 독창성은 현실주의와 풍자를 통한 자기미학의 추구이다. 얼마 후 홍루몽이 등장하면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문학사상은 오사운동 이후 신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오경재는 청조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살았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싹이 돋아 일시적 번영을 이루었다. 청조는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과거로 사대부를 끌어들이면서, 이학(理學)을 통치사상으로 삼아 지식인을 회유했다. 지식인들은 이록을 추구하며 함정에 빠져들었다. 오경재는 비천하고 수치스러운 작태라고 생각했다. 풍자를 통해 추악한 세태를 폭로하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평생 그의 생활과 사상은 크게 변했다. 부유에서 빈곤으로 추락하면서 부귀와 공명에 대한 관점은 상반적이었다. 그는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 집안에서 생장했으며, 절반 이상의 삶을 남경과 양주 두 지역에서 보냈다. 관료와 호신, 부잣집 자제, 과거 급제자, 명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상류층 인사들의 생활과 관료들의 무사안일, 고관들의 방자함, 부잣집 아들들의 평범하고 무력함, 과거 급제자들의 욕심, 명사들의 허세에 분개했다. 자기의 삶이 부에서 가난으로 추락했으므로, 상류층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유림외사에서 그는 이러한 유형의 지식인들이 정신적 삶이 부패한 것을 철저히 폭로했다.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아비판과 같은 폭로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노신(魯迅)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국민성을 철저히 해부한 것은 오경재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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