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장사귀(張士貴)는 당(唐)의 명장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기사(騎射)에 능하고 팔심이 남달라, 5백근의 활을 좌우로 발사할 수 있었다. 고구려 멸망의 주역 설인귀(薛仁貴)는 그의 부하였다. 수왕조 말기 고향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당을 세운 이연(李淵)에게 투항했다. 당의 통일대업과 변경확장을 완성하기까지 장사귀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인이 알고 있는 그는 유능한 부하 설인귀를 모해하는 악당이자 간신이다. 통속역사소설 설인귀동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장사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몽고 후허호터시에 사는 장주(張洲)가 1400년 전부터 이어진 족보를 전시했다. 끝부분이 중단됐지만, 선조는 장사귀였다. 장주는 족보, 묘지명, 관련 사료 등을 깊이 연구한 후, 자기의 조상 장사귀는 간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경(秦琼), 울지경덕(尉遲敬德) 등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한 명장이었다.

그의 사위 하종헌(何宗憲)이 설인귀의 공을 가로챘다는 것도 근거가 없다. 묘지명에는 관직에서 떠났다는 말만 있다. 관직을 떠난 것은 유주도독이었을 때이다. 묘지명은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완성됐으므로 그의 사위가 고구려 원정에서 공을 탐할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장사귀는 충신이자 명장이었다. 군인가문 출신으로 인재를 잘 등용하고, 부하를 사랑한 그는 예민한 정치적 통찰력까지 갖춰 문무를 겸비했다. 그러한 그가 왜 죄인이 됐을까? 신구당서는 물론 묘지명에 기재된 명장 장사귀는 송원 이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장사귀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정사와 상관 사료 어디에도 장사귀가 설인귀를 모해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장사귀가 설인귀를 모해했다는 고사는 순전히 문학가의 조작이다. 장해영(張海瀛)은 송원 이래 화본소설과 잡극에서 장사귀를 구세력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설인귀를 박해한 고사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문학가에게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투사하기 위해 허구가 필요했다. 제1차 고구려원정에서의 실패는 태종의 숙원이었다. 안시성전투의 승자는 우리와 중국에서 다르게 규정한다. 각자 승자로 보는 것이다. 원정의 실패로 마음에 병이 든 태종이 설인귀에게 말했다. “짐의 옛 장수들은 모두 늙어서 전쟁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동을 얻지 못한 것은 기쁘지 않으나, 경을 얻은 것은 기쁘다.” 고구려 원정에서 태종은 퇴역한 노장들을 포함한 숙장들을 등용했다. 그는 실패의 원인으로 장수들의 노쇠를 거론했다. 60세를 넘긴 장사귀가 전선에서 활약했다면, 설인귀의 용맹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태종이 설인귀에게 한 말이 후세 통속역사소설과 잡극에서 장사귀가 악역을 맡은 배경이다.

수당화본소설이 출현한 시기는 남송에서 명청교체기까지였다. 이 시기에 중국과 북방민족은 강력하게 충돌했다. 노장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타협과 화친을 추구하며, 주전파인 젊은 장수들을 억압했다. 이러한 현실에 반대하며 정의감이 넘치는 문학가들이 고대를 빌려서 지금을 비판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역사고사를 만들어 시폐에 반대하고 구세력을 비판했다. 장사귀가 물러난 후, 설인귀가 현무문을 지키는 중임을 대체했다. 658년, 설인귀가 2차 고구려원정에 참전할 때 장사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장사귀는 설인귀의 후원자였지만 늙고 쇠약했다. 그러나 설인귀는 과감하고 용감했다. 문학가는 충돌하는 문제를 잘라냈다. 장사귀는 부패한 노신에 비유했고, 설인귀는 주전파인 젊은 장수로 조작됐다. 상식적으로 역사는 정확한 사실로 지탱한다. 그러나 문학은 대담한 상상력으로 합리적 허구를 만든다. 그러나 명확한 한계가 있다. 중대한 사건은 지나친 억측으로 처리할 수 없다. 통속성이 강한 문학작품은 이분법적 선악론으로 인기를 얻는다. 창작과정에서 작가는 독자의 심리와 심미관에 영합하기가 쉽다. 역사는 다원적이고 유동적이다. 사학자나 문학가 누구도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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