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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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대쪽 같은 사류(士流) 가운데는 성균관 생원(生員) 출신이 많았다. 원리 원칙주의자들로 머리를 굽히지 않은 탓에 고집스런 면도 있었다. 속이 좁은 사람을 가리켜 ‘꽁생원’이란 말이 생긴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충신열사 가운데는 생원출신이 많았다.

기묘사화 때 정치개혁을 하려다 비명에 간 정암(靜庵) 조광조도 생원출신이었다. 정암은 젊은 시절에도 성품이 얼음장 같았다. 후학 선비들이 정암과 율곡(이이), 백사(이항복) 세 분의 호색(好色)을 비교 한 일화가 있는데 정암이 제일 좋은 점수를 받았다.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가 돼 고을을 순시했을 때 일이다. 나이 어린 기생 유지(柳枝)가 수청을 들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율곡은 나이 어린 기생을 보고 벽에다 키를 표시했다. 함께 잠을 잤으면서도 가까이 안했다.

백사는 천인 신분인 기생들의 인격도 업신여기지 않은 인물이다. 북청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 지방의 미관말직들이 젊은 기생들과 함께 찾아와 위로연을 열었는데 풍류를 같이 즐겼다.

정암은 얼굴이 준수한 미남이었다. 젊은 시절 공부방에 같은 마을 규수 하나가 다짜고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 사모하고 있으니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정암은 방문을 열고 큰 소리로 하인을 불러 처녀를 집 밖으로 내 쫓고 말았다. 선비들은 늦은 밤에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도 호색하지 않은 정암을 최고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성균생원 이후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간관이 된다. 오른 말과 행동으로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는 직책을 경험했다. 이후에 부패한 훈구파들에게 개혁의 칼을 들이대다 그만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선조 초에 억울함이 풀려 영의정에 추증되고, 유학자의 최고영예인 문묘에 모셔졌다.

조식(南溟 曺植)도 기묘사화 때 벼슬을 버린 학자다. 정암이 죽음을 당하자 처가가 있는 지리산에 숨어 나오지 않았으며 후학들만을 길렀다. 그러나 자신만이 살려고 산간에 숨은 비겁한 학자는 아니었다.

명종(明宗)이 그 명망을 듣고 벼슬을 주면서 출사할 것을 명했지만 끝내 지리산을 떠나지 않았다. 남명의 사직상소는 목숨을 내 놓고 임금과 권력 주변의 부패를 비판한 것이어서 유명하다.

“전하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니 백성들의 마음도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다만 선왕의 고아이시니….”

남명은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했다.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이다.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란 사람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후손’이라고 했다가 문중에서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얼굴을 못 들게 됐다. 그런데 지난 3월에는 ‘조’를 생각하면 기묘사화의 피해자가 된 조광조 선생이 떠오른다고 했었다.

비리혐의로 재판 중인 조 전 장관을 감히 남명이나 정암에 비교 하는가. 역사의 위인과 비교되는 인물이라면 보다 냉철해야 했고 펀드에도 관심 없었어야 했으며 자식의 입학 부정에도 단호해야 했다. 대통령 측근 부패에 대해 사정의 칼을 들이대고 권력자에게도 남명처럼 쓴 소리를 했어야 했다. 공정이란 가치가 무너진 세상이 되다 보니 코미디 같은 ‘조비어천가’가 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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