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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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주요 인사들 가운데 갑자기 얼굴이 두꺼워진 이들이 늘었다. 좌충우돌 사려 없는 행동으로 국민 밉상이 되는가 하면, 나서지 않을 때 나서 말을 잘못해 성토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왜 여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한가.

집을 두 채 갖지 못한다고 데드라인을 설정했으면서 눈감고 야옹하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얼굴 두꺼운 행보를 하고 있다. 하기야 현 정부의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서 하루가 다르게 뛰는 서울 강남 아파트를 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단칸방 하나 없이 월세로 살아가는 많은 국민들의 개탄과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집권당 고위 인사나 여야 국회의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대부분 강남 불패라고 하는 아파트다. 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우왕좌왕하면서 매일 천정부지로 가격이 뛰고 있다. 몇 년 사이 수억에서 수십억이나 오른 지역도 있다.

압구정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이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권력층이 아니면 정자를 짓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조선 전기 두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낸 압구정(鴨鷗亭) 한명회에 얽힌 이야기다.

이 아호는 명나라 문인 예겸(乂謙)이 지어준 것이다. 한명회가 서울에서 중국 사신으로 온 예겸과 만나게 되었다. 한명회는 예겸에게 아호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예겸은 ‘압구(狎鷗)’라고 이름하고 또 기(記)까지 써 주었다. 송(宋)나라 재상 한기(韓琦)가 은퇴하여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당호 이름을 압구정이라 했던 고사를 인용한다. 남을 교묘히 속이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버리고 무심한 갈매기와 벗 삼기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명회는 ‘압구정’ 정자가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오르더니 나중에는 사위인 임금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종은 정자가 완성되는 날 장인을 위해 어제시를 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였다. 사간원 대관들은 한명회에 대한 임금의 편애를 성토했다. 결국 성종의 어필 현판을 걸지 못했다.

당시 예겸의 고사를 알게 된 중국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을 오면 으레 압구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자가 작아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한명회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임금이 있는 곳에서만 치게 되어 있는 휘장을 자신의 정자에도 치게 해달라고 성종에게 청한다.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담당 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혐의하는가?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물러서지 않고 처마에 치는 장막인 보첨만(補簷幔)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거부했다. 성종의 비가 된 딸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삭탈관직까지 당한다. 죽어서는 부관참시 되는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소불위의 군력을 행사하던 한명회의 몰락은 욕심이 너무 과한 탓의 결과였다. 그가 아호대로 압구정에서 갈매기만 벗했다면 마지막 삶이 달랐을지 모른다.

정치인은 예나 지금이나 바르게 사는 것을 신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의 ‘정(政)’자는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지칭한 글자가 아닌가.

공직자가 재산에 너무 욕심을 내다가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강남불패’가 아니라 ‘강남실패’의 먹구름이 지금 여야 공직사회를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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