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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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한동안 많이 유행되던 말이다. 지금 세태에는 어떤 말이 유행할 수 있을까. 권력에 줄을 잘 서거나 당을 잘 택하면 죄를 지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라는 유행어가 생길만 한 세상이다.

이미 공정의 가치가 무너져 내린 한국사회, 마지막 양심의 보루인 사법부마저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결정이 속출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범죄혐의자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있다.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이 42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인정하면서도 풀려났다. 법원 양형 기준에 따르면 3000만원 이상 뇌물 수수에 대해선 징역 3~5년을 기본으로 최저 2년 6개월, 최고 6년 형(刑)을 선고하라고 돼 있다. 법조계에선 ‘전(前) 정권 인사들과 형평이 맞지 않는 결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억울한 사람이 풀려났다고 박수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법원의 결정에 미래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이러다가 사법부에 대한 불신풍조가 만연돼 국민적 저항으로 치닫지 않을까 우려된다.

조선 봉건 사회에서는 권력이 있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구속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조선 초 성균관에 다니던 권력자의 아들이 길을 가는 유부녀를 성추행했다. 그런데 범인은 잡혀가지도 않고 나중에 말썽이 일자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그런데 출세 길에도 전력이 문제 되지 않아 말년에는 여러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 돈이 있으면 잘못을 저질러도 감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지 않았다. 부자가 범죄를 저질러 관가에 기소되면 대신 매 맞을 사람을 보내면 죄를 면했다.

판소리 흥보가의 ‘매품’ 대목이 생각난다. 가난한 흥보는 처자식을 굶길 수 없어 아전에게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자 건네는 말이 매를 대신 맞아주고 돈을 받으라고 권한다. 집에 돌아 온 흥보가 매품 사실을 아내에게 실토하자 그녀의 처절한 절규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전략)…아이구 여보 영감, 중한 가장 매품 팔아 먹고산다는 말은 고금천지(古今天地) 어디 가 보았소.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불쌍한 영감 가지를 마오. 천불생무연지인(天不生無緣之人)이요 지불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궁기가 있는 법이니 설마한들 죽사리까. 제발 덕분에 가지 마오. 병영 영문 곤장 한 대를 맞고 보면 종신 골병이 된답디다. 여보 영감 불쌍한 우리 영감 가지를 마오…(하략).’

조선 세종은 13년 6월에 신하들에게 특별히 유시를 내려 사법의 정의를 강조했다. 형벌과 옥사를 집행하는데 공평해야 하며 정밀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전략)…법을 맡은 관리들은 옛 일을 거울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히 처리해야 한다. 마음을 공평히 해야 하며 자기의 의견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선입된 말에 집착하지 말며, 부화뇌동으로 전철을 본받지 말라. 구차하게 낡은 인습을 쫓지 말라…(하략).’

다산 정약용도 ‘재판의 기본은 성의를 다하는 것이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흠흠신서(欽欽新書)에 적고 있다. 흠흠(欽欽)이란 ‘삼가고 또 삼가다’는 뜻이다.

오늘날 법관들도 공평을 생명으로 해야 하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입신양명을 위해 아첨하지 말아야 한다. 현 정부의 반대편에 서서 불공정 시정과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국민들에 대한 사법부의 처사는 공정한가. 무리한 인신구속은 없는가, 또 ‘무권유죄’는 없는가. 모든 결정이 역사에 기록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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