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not caption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5>

한강교의 폭파작전(The explosion Operations of Han River Bridge)

한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4사단이 서울을 향해 신속하게 진격하던 27일 서울 북방에서의 국군의 창동방어선이 무너지고, 28일 01시경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돌파하자 서울의 최후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군 제4사단 제18연대를 지원하던 제105탱크여단의 서울시내 진입은 당시 군 지휘부가 ‘수도 서울 철수’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이었다.

이 무렵 28일 02시경 채병덕 총참모장은 육본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 전차가 미아리를 넘어서 서울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급보를 받고,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즉시 한강에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가서 실시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육본(당시엔 현 삼각지, 전쟁기념관 자리)을 이탈했다.

그 시간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한강교 폭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서 김백일 대령(육본 참모부장)에게 최후방어선 병력과 시가지 방어부대가 후퇴명령이 없어서 아직 철수를 못했으니 다리를 먼저 끊으면 안 된다, 병력이 철수한 다음에 폭파하자고 요청했고 김백일 대령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즉시 가서 한강교 폭파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육본과 폭파지휘소간에 통신선이 가설돼 있지 않아서 작전국장 장 대령이 직접 노량진에 위치한 남한강파출소로 갔지만 차량과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막혔고, 중지도 부근에 도달했을 때 한강대교는 폭파되고 말았다. 이 시간이 28일 02시 40분경이었다.

그 당시 ‘한강교의 폭파작전’은 27일 11시에 채병덕 총참모장이 육군본부 참모 및 재경부대장회의를 긴급히 열어서 육본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인도교와 철교의 폭파계획을 발표하면서 거론됐다. 27일 12시경부터 육군본부를 시흥의 육군보병학교로 이동했다가 맥아더 원수의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연락단(ADCOM)이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미군 고문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다시 16시에 육군본부를 시흥에서 용산(삼각지)으로 이동시켜서 서울 최후방어선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처럼 군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었으니 전후방 각급 부대들에 대한 적시적절한 지휘결심과 상황조치 등 일련의 체계적인 군지휘가 이뤄질 수 없었으며, 사단장급 현지 지휘관들에 의한 독자적 판단으로 국군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군지휘부가 마비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국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지 않았던 것만도 그나마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 있었던 비참한 패전상황의 3일간 이었다.

6월 28일 02시에 폭파된 한강인도교.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6월 28일 02시에 폭파된 한강인도교.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6.25전쟁 초기 전투국면에서 최악의 실책은 바로 ‘한강교 조기폭파’였으며, 이 오판으로 국군 전투부대의 약 50%가 와해(瓦解)돼 한강도하를 해야 했다. 따라서 전쟁초기 국가위기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헛소리와 우유부단한 채병덕 총참모장의 무능이 저지른 직무유기(職務遺棄)의 범죄(犯罪)라고 할 수 있다.

한강교량의 폭파준비는 이미 26일 저녁에 의정부가 점령되고 창동과 미아리로 철수하던 26일 야간에 채 총장이 최 공병감에게 “임진강교의 폭파실패를 상기시키면서 한강교 폭파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착수가 됐다.

최 공병감은 지시를 받고 27일 09시에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한강교 폭파준비명령을 하달했고, 12시~15시 30분까지 한강교의 5개 교량에 7000파운드의 폭약설치를 완료했다.

최 공병감은 채 총참모장으로부터 적의 서울시내 진입 2시간 전에 파괴하도록 지시받았으며, 이때 상황으로는 27일 16시를 폭파예정시간으로 계획해 폭파준비를 했던 것인데, 16시경 시흥으로 철수했던 육군본부가 다시 용산(삼각지)으로 복귀하면서 폭파장치를 제거했고 비상대기를 시켰다.

그러나 창동-미아리방어선 전투가 악화일로를 치닫는 상황 하에서 28일 02시시경 다시 폭파 준비하라는 채 총장의 전화명령을 받게 되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제거한 폭약을 재장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28일 02시 40분경 최 공병감은 엄 공병학교장에게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강교상에는 밀려드는 피난인 인파와 차량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마침 이시영 부통령이 탄 차량일행이 지나고 있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작전명령이 떨어진 이상 지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현장에 있었던 엄홍섭 공병학교장은 장약점화를 지시했다. 당시 육본과 폭파지휘소간에 통신선이 가설돼 있지 않아서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직접 노량진에 위치한 남한강파출소로 갔지만 차량과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막혀서 그가 중지도 부근에 도달했을 때 한강대교는 폭파되고 말았다.

비극적인 상황은 당시 한강(인도)교 상에는 500~800명 가량의 피난민이 있었으며, 차량은 50여대가 있던 채로 폭파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작전의 지휘계통은 총참모장(채병덕 소장)-참모부장(김백일 대령)-공병감(최창식 대령)-공병학교장(엄홍섭 중령)으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Tip> 한강교 조기폭파 책임자는 누구인가?

당시 한강에는 한강(인도)교, 광진교,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5개 교량이 전부였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에 의해 28일 02시 40분경에 한강교를 폭파했다. 전쟁 중에도 한강교 조기폭파에 따른 국민적 비판여론이 들끓자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1950년 9월15일 최 공병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후 9월 21일 총살 처형됐다. 이 사고의 책임은 폭파명령을 하달한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있음이 명확하나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최창식 공병감을 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한 국가범죄로 종결됐다.

그 후 14년 만에 최 대령 부인의 재심청구로 1964년 10월 23일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재심을 했고, 최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해 명예를 회복시켰다. 실질적인 지휘책임자로 볼 수 있는 채 총참모장은 재판이 있기 전에 1950년 7월 27일 진주 하동전투에서 적에게 기습을 받아 향년 36세로 죽었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던 9월 21일에 왜 서둘러 군법회의를 열어 무리한 사유로 최 공병감을 처형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한강교 조기폭파로 강북 투입 5개 사단의 와해

채병덕 총참모장의 조급한 한강교 폭파결정으로 인해 강북에 투입된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돼 국군 총병력의 46%인 4만 4000여명(제1, 7사단, 예비 제2, 3, 5사단 포함)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정부와 군지휘부는 전면전을 대비하지 않았으며, 전시 철수계획 등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로 북한군의 남침을 받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철수와 국민에 대한 소개령(疏開令)이 불가했다.

특히 ‘서울 사수론’에 집착했던 채 총참모장의 어리석은 과욕은 후방의 제2, 제3, 제5사단까지 육군 작전명령 제93호(1950년 6월 26일 08시) 및 제98호(1950년 6월 27일 17시)에 서울로 이동을 명령했다. 이 명령으로 국군의 주력부대가 한강이북지역에 집결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철수명령도 없이 육군본부가 철수와 복귀를 반복하는 등 그 혼란상은 죽음을 무릅쓰고 방어하는 최후방어선의 국군장병을 비교하면 군법회부감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전투장비면에서 열악한 국군부대의 전투부대와 전투지원부대의 중장비와 공용화기의 70%를 버리고 패주해야했다.

이처럼 무능한 한 명의 장군(채병덕 총참모장)이 저지르는 오판(誤判)이 때로는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서울함락’과 ‘한강교 조기폭파사건’은 말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이 군의 호언장담을 믿고 피난의 시기를 놓쳐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간 공산 치하에서 온갖 고초와 죽임을 당하며 견뎌야 했었고, 정부와 군지휘부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극(極)에 달했다.

뗏목(raft)으로 한강을 도하하는 국군장병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뗏목(raft)으로 한강을 도하하는 국군장병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이후 이촌동 한강대교 입구에 북한군 전차가 출현한 것은 한강교가 폭파한지 9시간이 지난 28일 밤 10시경 이었다니 조금만 더 군지휘부(채병덕 총참모장)가 침착했어도 국군의 철수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어서 28일 04시경에 광진교도 폭파됐고,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가 불발로 그쳐서 다시 점화했으나 철교의 일부분만 손상됐을 뿐 절단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이 다리는 북한군의 도하공격에 이용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반격이 개시되고 한강도하 북진공격 시에는 끊어진 한강교 옆으로 미 공병부대가 부교와 도보교를 설치해 군사작전을 도왔고, 1951년 1.4 후퇴 시에는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부교와 도보교를 통해서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1951년 6월 미 공병부대가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복구해 정상화시켰다.

지금도 한강철교를 지나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교각에 6.25전시 피탄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반면에 6.25전쟁기간 중 북한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 시 대동강교를 시기적절하게 폭파함으로써 공격을 지연시켰고, 북한군의 부대와 장비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6회에 계속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