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미국과 UN안보리의 신속한 전황파악·대응조치가 이뤄진 것은 기적이었다
[6.25전쟁 이야기] 미국과 UN안보리의 신속한 전황파악·대응조치가 이뤄진 것은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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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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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6> 

미국의 신속한 대응(The speedy actions of USA)과 트루먼 대통령

북한군의 남침소식은 주한 외교사절이나 특파원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미국으로 주한 미 대사관 및 무관, 군사고문단, 외신기자의 전문을 통해 전쟁발발 5시간 후인 6월 25일 09시 30분(미국 워싱턴 현지시간 24일 20시 30분)에 전달됐고, 주한 미국대사관 무쵸(John J. Muccio) 대사의 보고서는 워싱턴 현지시간 24일 21시 26분(한국시간 25일 10시 26분)에 국무성에 도착했다. 이 보고서에는 “북한의 공격은 그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공격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는 내용과 개성지역이 피탈됐다는 한국의 위기상황을 신속정확하게 보고함으로써 미국의 조치가 긴급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무쵸대사의 신속한 상황보고는 무방비상태로 기습을 당한 한국과 한국군에게 소중한 도움이 됐다는 것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긴급한 보고에 접한 미 국무성은 즉각 국방성 관계자와 협의를 거쳐 유엔(UN)에 제소키로 방침을 정하고 유엔사무총장 리(Trygve Lie)에게 통고하는 한편,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은 25일 13시 20분 (현지시간 24일 23시 20분)에 주말 휴가 중인 트루먼(Harry S. Truman)대통령에게 보고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UNSC: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를 소집요청을 했다. 당시 미국의 주요 정계지도자들은 북한의 기습남침이 유엔과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보존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위상에 대한 공산진영의 첫 도전이라고 판단해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남침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침을 제지하지 않는다면 과거 독일의 체코와 폴란드 침공을 방관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사례와 유사한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이므로 제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미국 주도의 단호한 조치를 결심했다.

유엔안전보장회의 2차 결의안 채택장면(1950.6.27).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8
유엔안전보장회의 2차 결의안 채택장면(1950.6.27).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8

또한 유엔도 세계평화를 파괴한 공산세력의 침략행위에 대해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이 한낱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25일이 ‘일요일’임에도 14시(한국시간 26일 03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해 북한에게 한국에 대한 침공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제82호)을 가결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한국대사 장면박사가 참관인(observer)으로 참석했다. 이 결의안이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됐음에도 공격행위를 계속하자 유엔 안보리는 27일 다시 한국이 북한의 군사행동을 격퇴하고 한반도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유엔회원국들에게 권고하는 결의안(제83호)을 가결시켜 유엔이 북한에 대한 범세계적 응징에 나선 것이다.

그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조치가 없었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발발 10시간이 경과중인 6월 25일(일) 14시(한국시간 26일(월) 04시)에 긴급히 개최될 수가 없었다. 이날 안보리(UNSC)는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제82호)을 채택해 북한에 대해 응징할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안보리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5개 상임이사국 등 총11개 국가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소련 대표가 불참해 결정적인 거부권(veto)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의안이 ‘찬성 9, 반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로 가결(可決)될 수 있었다. 5개 상임이사국 중 1개국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수결의 결과와 무관하게 부결(否決)처리되는 원칙이 있다. 만일 그 자리에 소련이 참석해 반대 1표만 행사했더라면 결의안은 부결되는 것이고, 신생국 대한민국의 운명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패망의 길로 갈 뻔했다. 다행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소련이 불참했다고 본다면 아찔한 역사적 시간이었다. 그날 소련이 불참한 것은 1950년 1월부터 자유중국(Republic of China)이 중국의 대표권과 거부권을 보유한데 대한 항의로써 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사건 가운데 있었다. 이 결의안은 유엔이 창설(1945년 10월 24일)된 후 침략전쟁을 일으킨 국가를 응징하고, 평화의 회복이라는 유엔의 첫 번째 집단안전보장 조치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결의통보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6월 27일 창동-미아리 방어선까지 진출해 수도서울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제식민지로부터 1945년 독립해 이제 5년차의 신생국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구원은 기적(miracle)과 같은 조치였다. 미국 정부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주관하는 안전보장회의(NSC)가 25일 심야인 23시(한국시간 26일 12시경)에 열려서 ‘미국이 즉각 실시해야 할 행동’을 결정했고, 이미 미 합동참모본부에 준비명령으로 하달 된 ‘제한적 군사조치’로써 “사태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반을 파견하고 탄약지원과 자국민의 철수를 보호할 목적으로 해·공군을 운영하라는 지시”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이 결과가 정식명령으로 맥아더(Douglus McArthur) 극동군사령관(FECOM)에게 하달됐다. 그런데 이 명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오기 전에 26일 03시경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달라는 항의 섞인 전화를 받았고, 맥아더 장군은 적극적인 군사조치를 약속했다는 후문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날 회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전원이 ‘한국을 구원해야한다’는 방침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미국이 ‘애치슨라인’이라는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사실과 모순됨에도 이것이 토의의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처한 전쟁 상황을 모르는 가운데 지원방법상의 이견이 있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신생국 한국이 처한 상황이 중대하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만일 그 회의에 참석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자신의 제안 선포한 ‘애치슨라인’을 고집했다면 미국의 참전은 불가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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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한국 지원’을 즉각 결심한 대한민국의 은인(Savior) 트루만 미 대통령은 누구인가?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은 미국의 제32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1945.4.12)으로 승계해 제33대 대통령(61세)이 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884년 5월 8일, 미주리주 러마에서 태어났으며, 부농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 시력이 나빠서 사관학교에 못 갔지만 시력검사표를 외워서 주 방위군에 선발된 얘기는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프랑스에 근무하다가 포병 대위로 제대했다. 6.25전쟁 발발의 보고를 최초로 받은 곳은 고향 미주리 캔사스시티에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6.25전쟁 발발 후 그의 결심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의 은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동상은 현재 임진각 공원에 세워져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원자탄투하를 결정했으며, 맥아더 장군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퇴임 후 재선을 포기했으며, 별칭으로 서방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작은 거인’이라는 의미의 “Little Big Man”이란 애칭을 얻었다. 1972년 12월 26일 서거해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만도서관 묘지에 안장돼 영면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초대주미대사의 외교적 활약

한편 서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25일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나 전쟁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이 대통령은 “국군이 보유한 탄약은 10일 이내에 다 떨어질 것이다.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에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남녀노소가 다 일어나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서라도 싸울 것이다. 충분한 탄약이 있다면 우리 국민과 군의 사기는 더욱 오를 것”이라고 탄약지원을 특별히 요청했다. 면담 후 25일 13시경 곧 바로 워싱턴에 있는 주미대사관 장면 대사를 호출해 자력으로 북한 남침을 저지하기가 어렵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미국 정부의 원조를 요청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조치는 탁월한 판단으로 미국에서의 독립활동에서 쌓은 국제적 인식이 빛나는 지도력이었다. 이에 장면 대사는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했고, 이때 미국정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요청 소식을 통보받았으며, 곧 바로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6월 26일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했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해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초대 주미대사 장면의 역할은 놀라운 구국의 외교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서울 주재 유엔한국위원단(UNCOK :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도 25일 14시~18시에 회의를 갖고 대응방책을 논의 후에 21시 중앙방송을 통해 북한군의 즉각적인 군사행동 중지와 38도선으로 철수를 요구하고,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25일 24시경(워싱턴 현지시간 25일 11시)에 리 사무총장에게 도착했다.

한편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25일 09시 25분에 주한 미 대사관 무관 및 연락장교단으로부터 기습남침보고를 받았으며, 21시 35분(워싱턴 현지시간 25일 10시 35분) 한반도 전황을 상세히 요약한 상황보고서에 “한국으로 탄약수송이 우선 조치돼야 하며, 예비조치로써 제7함대를 한국해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건의한다”고 미 육군성에 접수시켰다. 맥아더 장군은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어떠한 작전에 관한 임무도 부여받지 않았던 상태로서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이것은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에 잘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과 친분이 작용한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북한이 6월 26일 ‘유엔안보리 결의(제82호)’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하자 26일 오후 9시(한국시간 27일 오전 10시)에 2차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어서 미 해공군에게 38도선 이남의 북한군 부대·전차·포병에 대한 공격을 허가하고, 한국군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제공한다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미국은 ‘유엔안보리 결의(제83호)’에 따라 ‘7월 1일’ 미 지상군을 참전시켰다. 그리고 유엔군(전투부대 파견 16개국, 의료부대 파견 5개국)도 이 결의안에 근거해 지원됐다. 드디어 유엔군사령부(UNC : United Nations Command)가 결성된 것이다.

주미 초대대사 장면이 유엔사무총장 리(Lie)를 만나고 있다. 1950년 6월26일 장면대사는 유엔안보리에 참석해 남침상황과 한국에 대한 유엔의 지원을 호소했다. (제공: UPI) ⓒ천지일보 2020.6.18
주미 초대대사 장면이 유엔사무총장 리(Lie)를 만나고 있다. 1950년 6월26일 장면대사는 유엔안보리에 참석해 남침상황과 한국에 대한 유엔의 지원을 호소했다. (제공: UPI) ⓒ천지일보 2020.6.18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신속한 한국 전황 파악조치

그 당시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비전투요원(noncombatant)들의 철수작전 시행과 더불어 해공군의 지원 하에 한국군에 대한 탄약지원을 우선적으로 서둘렀다. 실시간으로 전투상황을 파악해 지휘조치를 하기 위해서 6월 27일 처치(John H. Church)준장을 단장으로하는 조사반(Survey Party)구성했는데, 이날 하달된 명령에 의해 이 조직을 전방지휘연락단(ADCOM : Advance Command and Liaison Group in Korea)로 명명해 수원으로 전개했다. 처치 준장은 수원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을 만나 방어 작전을 조언하는 등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지원 사항을 파악하고 복귀했다. 그리고 처치 준장은 전반적인 전황을 판단한 결과 미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신속히 보고했다. 처치 준장의 판단은 한반도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맥아더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고였기에 한국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훗날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른 아침, 나의 침실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당직장교가 ‘장군님! 오늘 아침 04시에 대규모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해 왔습니다….’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9년 전 일요일 아침, 같은 시각에 나는 마닐라에서 똑같은 전화벨 때문에 일어나야했다….(중략)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똑같은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 리가 없다. 그런데 이때 알몬드 참모장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지시하실 사항은…(후략).”

이것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됐던 ‘맥아더 회고록’의 일부이다. 맥아더장군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전쟁이 현실적으로 발발한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미국의 한국에서의 고의적인 ‘전쟁유발설’에 대한 명백한 반증(反證)이 되기도 하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아직도 사회일부에서 ‘6.25전쟁이 북한의 명백한 불법남침이 아니라 미국의 책동이었다’는 등의 억지주장을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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