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국군 제6사단의 춘천지역 전투는 軍·警·學·民의 제2의 행주대첩이었다
[6.25전쟁 이야기] 국군 제6사단의 춘천지역 전투는 軍·警·學·民의 제2의 행주대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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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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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3>

구국의 춘천대첩(春川大捷)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사단이 책임지는 광정면의 방어정면은 적목리(현 경기도 가평군 북면)-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까지 84㎞에 이르렀다.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조공으로 예상되는 양구-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그리고 화천-가평 접근로에 2개 중대를 배치해 진지를 강화했다. 이 강원도 중동부 공격로를 택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임무는 춘천과 가평을 신속히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에서 조공으로 진출해 서울 남부와 수원방면으로 대우회포위기동작전(大迂廻包圍機動作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Tip> 대첩(大捷)의 의미는?

대첩은 국어사전적 의미가 ‘크게 이김. 대승(大勝)’으로 영어로는 ‘A sweeping victory’로 표기한다. 전쟁 중 전투에서 아군이 적을 크게 이겼을 때 쓰는 명칭으로 지역 명에 붙여 쓴다. 대첩은 국가의 운명과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전투의 대승을 칭한다. 6.25전쟁 개전일 ‘춘천대첩(春川大捷)’은 백척간두의 국가의 운명을 구한 구국의 대승이었다. 춘천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패망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대첩으로 명명된 전투는 살수대첩(612년), 귀주대첩(1019년),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대첩(1592년), 행주대첩(1593년), 명량대첩(1597), 일제시대-청산리대첩(1920년)이 있었다. 

이 작전의 입증은 인민군 총사령부로부터 하달된 정찰명령 제1호(1950.6.18.)와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서 확인된다. 정찰명령 제1호의 내용에는 “공격이 개시되면…(중략)…서울-춘천 철로와 도로상의 이동상황을 파악한다…. (중략)…정찰을 통해 서울-수원-이천 도로상의 이동과 곡수, 수원, 이천부근의 적 활동을 파악한다”고 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도 “사단은 최후임무로 춘천을 당일 내로 점령한 후 가평, 강촌방향으로 진출한다”고 명시해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임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국군은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육군본부가 포로가 돼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후평가이기도하다. 그런데 이런 북한군의 전략전술기도를 초전에 격파한 것이 국군 제6사단이 버텨준 춘천지역전투의 5일의 기적이었다.

6.25전쟁 개전 당시 국군 제6사단 주요지휘관.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6.25전쟁 개전 당시 국군 제6사단 주요지휘관.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개전 당일 25일 소양강을 도하해 춘천을 점령하고자 했던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축선으로, 제12사단을 인제에서 신남-홍천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했다. 화천-춘천 접근로에는 모진교(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됨)가 있었는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사전 폭파에 실패해 SU-76자주대전차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봉의산과 우두산일대를 주저항선으로 구축했다. 이 무렵 제7연대 본부소속 5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중위가 옥산포로 접근하는 적 SU-76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 이 전과가 전파되자 제7연대 장병들은 적T-34전차와 SU-76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지점에는 심일 중위(후에 소령 추서/육사8기)의 전승기념비가 제막돼있어 그 날의 영웅적인 전투를 추모하고 있다. 육사교정에도 심일 소령 기념비가 있다.

춘천을 점령하려고 공격하던 북한군 제2사단은 소양강 백사장을 집결대형으로 공격해오다가 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105㎜ 견인포)의 집중포격으로 소양강이 피로 물들 정도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은 이야기는 북한군이 아군의 포격에 대량살상이 되면서도 부대별로 오와 열을 맞춰서 백사장 개활지를 정면으로 무모한 공격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역골로 퇴각했다. 이 전투를 봉의산 전술지휘소에서 지켜보던 국군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적의 작전지휘능력과 전투기량의 수준을 갈파하고 춘천을 사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아군의 105㎜견인포 훈련장면. (출처: 국방일보) ⓒ천지일보 2020.5.28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아군의 105㎜견인포 훈련장면. (출처: 국방일보) ⓒ천지일보 2020.5.28

한마디로 이 혈전은 포병전투였다. 병력의 부족으로 포탄을 공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춘천방직공장 여직공들과 춘천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손에 포탄을 들고, 시민들이 지게에 지고 포탄을 운반해 주는 군(軍)·경(警)·민(民)·학(學)의 총력전으로 싸운 춘천전투는 구국(救國)의 도시라는 명예를 남겼다.

특히 강원도 경찰의 참전과 군경합동작전은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졌던 점도 춘천전투의 비사(秘史)이다. 경찰국 경비계장 손계천 경감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는 선후배간으로 평소에 친밀한 유대를 가졌으며, 춘천역 뒤 소양강 제방에 춘천서 병력과 강원경찰학교 교육 중인 신임순경 중대가 배치됐다. 후평동으로 우회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 9대대를 배치했고 전투에 참가해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처럼 춘천전투는 6.25전쟁에서 첫 군경합동작전의 승리로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전투가 중동부전선의 결전장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예비연대 제19연대를 춘천으로 이동 배치했다. 26일 아침 북한군이 재공격을 위해 역골-옥산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파쇄(破碎)공격을 해 격퇴시켰고, 14시경에는 북한군 제6연대가 초월(超越)공격으로 옥산포-마전리-춘천방면으로 투입했으나 전날 아군 제19연대가 증원된 사실을 모르는 북한군은 포병의 집중포화에 걸려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그럼에도 적은 제2, 제3제대를 같은 방향으로 병력투입을 했으나 아군의 집중포격에 소양강 도하는 좌절됐다.

27일 아침 북한군 제2군단장은 제2사단의 돈좌(頓挫)상황에 따라 제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춘천지역으로 증원시켰다. 10시부터 T-34전차와 SU-76자주포를 앞세워 봉의산 방면으로 집중공격을 재개했으나 국군 제7연대가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다. 이 무렵 그동안 두절됐던 육군본부와 유선망이 소통됐다. 육본은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遲延戰)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됐다. 이때서야 김종오 사단장은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오후에 북한군이 전차로 소양교를 돌파하면서 춘천 동북방 원진나루터 쪽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국군 제7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7시 30분경 춘천을 포기하고 원창고개 방향으로 철수했고, 18시경 북한군이 춘천시내를 진입했다.

28일에는 춘천에서 철수한 제7연대는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하고, 연대주력은 홍천북쪽 사현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제7연대는 격전의 와중에서도 건제를 유지한 채 질서 있게 계획된 철수작전을 완료해 전투력을 보존했다. 국군 제6사단은 비록 춘천을 상실했지만 제7연대와 제2연대의 원창고개-말고개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투에서도 성공했다.

29일 오전 북한군은 오전 2개 연대규모로 원창고개를 재공격했다. 제7연대 제2대대가 격퇴했으나 11시경 백기를 든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서 철수를 했고, 홍천북쪽 사현에 있는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오후에는 홍천-원주방향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하게 됐다.

춘천지역 전투에서 압도적인 북한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장교 8명을 포함한 200여명 전사와 전상 353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인 반면에 북한군은 제2사단 포병사령관을 포함한 6572명의 전사상자를 내었고, 122명의 포로가 잡혔으며 7대의 SU-76자주포와 18대의 전차가 손실되는 대패를 당했다.

 北, 춘천 통해 가평·강촌 진출 계획
 SU-76자주대전차포 앞세워 진격
 심일 소령, 자주포 격파로 사기 올려
 
 포병대대, 소양강 백사장서 큰 승리
 방직공장 여공·학생·시민들 나서 
 손에 들고 지게 지고, 포탄 공급 도와 

 제6사단, 5일간 춘천 철옹성 방어  
‘한강방어선’ 형성 시간적 여유 벌어

북한군의 ‘선제타격계획’의 제1단계는 제2군단은 25일 내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방면으로 신속기동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위망 내의 국군주력을 섬멸하는 ‘대우회포위기동작전’으로 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전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의 춘천지역전투는 서부전선과 달리 국군 제6사단이 철옹성같이 춘천지역을 방어하고 북한군 제2사단을 궤멸시킬 정도의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살아있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신(神)이 내린 명장이었다.

반면에 서울을 28일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가 3일간 지체하는 전략적 과오를 한 것은 동부전선의 춘천전투의 결과가 한강도하라는 작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춘천전투의 성공으로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초기 1단계 작전이 실패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국군 제6사단의 전승이었으며, 당시 북한군에게도 국군이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일침(一鍼)을 주었다. 지난 2000년도에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춘천시 입구 소양강변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건립돼 그날의 구국투혼을 기념하고 있다. 특히 조형물에는 장병과 함께 싸운 경찰, 학생, 여직공, 시민이 표현된 민관군경의 총력전이었던 춘천대첩(春川大捷)을 담아 호국안보의 중요성을 보였고, 이에 이곳은 구국의 도시 춘천의 명소가 돼있다.

춘천대첩기념 주모형물과 춘천대첩 헌정시.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춘천대첩기념 주모형물과 춘천대첩 헌정시.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동해안지역전투

국군 제8사단이 방어책임진 동해안지역은 제10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의 책임지역은 제6사단과 협조점인 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서 동해안 기사문리(현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26㎞로 비교적 작았지만 해안선을 따라 종심으로 강릉까지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6월 중순에 침투한 북한의 무장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차출해 오대산과 계방산 지역에 투입했기 때문에 유사시 동원병력은 4개 대대에 불과했다.

국군 제8사단 정면의 북한군은 제5사단 제10연대를 제1경비여단에 배속시켜 주력으로 동해가도(7번국도) 북쪽에서 국군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게 하고,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로 국군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는 가운데 일부 병력을 북진시켜서 강릉 연곡천 일대에서 국군 제10연대의 후방을 협공하려고 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 제10연대는 주저항선을 화상천에서 연곡천으로 물렸고, 제21연대는 게릴라 소탕작전을 위해 광활한 지역에 분산 배치됐다가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을 색출 격멸했다.

국군 제8사단은 연곡천과 사천일대에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방어해 북한군의 초기전투 작전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27일 오후에 대관령으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재편성(再編成)을 마치고 28일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을 감행해 강릉부근까지 진출하던 중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반격을 중단하고 대관령을 철수한 후 대화를 거쳐 제천으로 이동했다.

동해안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입장에선 국군 제8사단이 인접 제6사단으로 증원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강릉이남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국군 제8사단을 양분하고 전술적으로 혼란을 주기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용전분투하는 저항으로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효과가 있었다.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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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2020-05-29 11:06:58
대첩이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였군요. 춘천대첩. 정말 이순신 장군이 되살아난 것 같습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군인들과 국민이 하나되어 그 당시 얼마나 피땀 흘리며 전쟁을 치렀을까.... 정말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