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지리멸렬 도하하는 국군을 수습해 한강방어선 전투를 준비했다
[6.25전쟁 이야기] 지리멸렬 도하하는 국군을 수습해 한강방어선 전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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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한강방어선을 혈전으로 지킨 국군용사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한강방어선을 혈전으로 지킨 국군용사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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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8> 

한강방어선 전투를 이끈 구국의 명장 김홍일 소장

한강(Han River)은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국에서 가장 큰 강이다. 서울 부근의 강폭이 700m에서 1500m이고, 수심이 평균 3m이상에 달해 도하장비 없이 중장비가 도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한국군에게 있어 가장 유리한 천혜의 방어지형이었다. 육군지휘부는 한강선을 방어선으로 이용한다는 작전구상조차 없이 막연하게 자연장애물로써 북한군의 진출이 지연될 것이라는 정도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미 극동군사령부(FECOM) 전방지휘소(ADCOM)의 처치 준장의 조언으로 서울 실함직전에 총참모장 채병덕은 한강을 이용한 방어선으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본을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강선 방어임무의 전권을 부여했다.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소장은 당시 중국 국민군에 가담해 사단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로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자 즉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 제7사단장’으로,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 수도사단장’으로,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 제2사단장’에 임명하고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 정면의 방어선 편성에 들어갔다. ‘혼성사단’이란 이름만 사단이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 불과했고, 공용화기란 연대 당 고작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는 소총부대에 불과했다.

우선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도하해 집결하는 병력을 500명 단위로 채워지면 ‘혼성 제0대대’로 명명해 한강방어선으로 투입하는 한편 한강방어지역별 혼성사단으로 도하하는 병력을 수습해 자체병력으로 편성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김홍일 장군의 노련한 부대지휘로 6월 29일 임기응변식으로나마 병력이 배치돼 한강방어선이 형성됐다.

이 시기에 북한군 수뇌부가 서울에서 3일(6월 28~30일) 가까이 지체한 것은 기습을 당한 한국군에게는 한강을 도강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해서 지연전을 전개할 시간을 벌 기회였다. 북한군이 그 당시 즉각 한강도하공격을 하지 못한 것은 도하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북한군 전선사령부 공병부 부부장 주영복이 회고록에서 “공병의 원시적 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북한군은 개전 초 보병·포병·전차에 집중하다보니 공병과 통신 등 전투기술병과에 대한 준비가 소홀한 채 남침했고, 그 문제점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북한군의 결정적인 전투력 결함으로 나타났다. 즉 주요 전투국면에서 통신이 두절돼 부대 간 전투협조가 부족했으며, 남한강, 금강, 영산강 등 한반도의 횡으로 형성된 큰 강 앞에서 공병도하장비의 부족으로 공격중단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한강방어선을 사수한 6일간의 전투는 나라를 구한 국군의 혈전

김홍일 소장.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김홍일 소장.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한강방어선 전투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김홍일 소장) 예하 3개 혼성사단(수도, 제2, 제7)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해 북한군 제1군단(김웅 중장) 예하 3개 사단(제3, 제4, 제6)및 전차 1개 여단(105전차여단)의 공격을 6일간 방어한 전투이다. 북한군은 29일 밤부터 한강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혔다. 다시 북한군은 국군 진지에 포격을 실시하면서 제4사단을 여의도와 영등포 방면으로, 제3사단을 흑석동과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 공격했으나 국군의 필사적인 방어로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영등포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는 7월 3일까지 5회에 걸친 북한군의 도하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사수해냈다. 이때 미 극동공군의 항공기(B-26, B-29폭격기와 F-80, F-82전투기)가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폭격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처지 준장의 ADCOM을 통해 한국군을 지원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조치였다.

29일에는 북한군 제6사단이 김포방면으로 기습도하를 해 김포비행장에서 영등포방면으로 진출하면서 한강방어선의 서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30일 아침에는 북한군 제3사단이 포병과 전차포의 지원 하에 서울 동남방 서빙고나루터에 도하를 개시했다. 7월 1일에는 미명부터 적 제4사단이 도하공격을 했다. 경부선 철교를 확보할 목적으로 아군복장을 한 편의대 1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의 소화기와 수류탄 집중공격으로 돌파기도가 분쇄됐다. 1일 밤 북한군 공병은 철도선로반원과 시민을 강제동원해 은밀하게 경부선 철교복구작업을 실시했다.

7월 2일 전날에 이어 치열한 쌍방교전이 있었고, 노량진 대안의 적 제3사단이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병력부족으로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고, 반면 여의도 대안의 북한군 제4사단은 다시 국군 제8연대를 돌파 시도했으나, 수차례의 혈전 끝에 국군은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7월 3일 북한군 제4사단이 경부선 철교를 은밀히 복구완료하고 04시경 최초로 전차 4대(T-34)를 도하시킴으로서 한강방어선이 돌파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후속병력이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진출하고, 뒤이어 열차를 이용해 전차 13대와 병력을 진출함으로써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성수도사단 장병들은 시내의 공장과 건물 등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면서 결사적으로 시가전을 전개했다. 참고로 3일 저녁 북한군 제6사단은 6대의 전차를 선두로 인천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강방어선전투는 열세한 장비와 병력을 가지고 한강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6일간 막아낸 성공적인 방어전투였다. 이 시간을 이용해 국군은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을 할 수 있었으며, 29일 오후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김홍일 사령관의 안내로 이뤄졌고, 30일에는 미지상군 지원이 결정됐고, 미 지상군이 지원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이런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준 중요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김홍일 사령관은 “앞으로 3일 동안 한강선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3일간을 더 버텼다는 것은 국군의 애국투혼과 자신감의 회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강방어선의 돌파상황을 파악하던 김홍일 사령관은 예하부대들에게 즉시 안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해 병력과 장비를 보호했다. 그 후 수원-장호원-제천선을 연하는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반면에 한강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 제4사단은 전사 227명, 부상1822명, 실종 107명으로 총2156명의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 피해는 개전이후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4일간의 손실 1112명에 비교할 때 거의 2배에 이르는 것에 비춰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알 수 있다.

<Tip> 구국의 명장 오성장군 김홍일은 누구인가?

김홍일(1898.9.23.~1980.8.8.)은 평북 용천출생으로 중화민국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군인 겸 정치가이다. 오산학교 교사로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 1921년 육군군관학교 졸업, 1923년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광복이후 국민혁명군에 복귀해 중장(2성)으로 진급했다. 귀국 후 1948년 12월 이승만대통령의 특별지시고 육군준장에 임관해 육사교장을 역임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돼 와해된 국군을 수습해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간 한강방어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이 방어전투에서 지휘능력을 발휘해 맥아더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과 미 지상군의 전개시간을 보장하는 전공을 세웠다. 7월 5일 육군의 개편시 초대 제1군단장(3성)으로 임명됐다. 일명 5성장군이라는 것은 중국군과 한국군에서 별의 수를 더한 의미이다. 전쟁 중 예편해 주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노환으로 83세에 타계했다.

정일권 신임 총참모장의 임명과 한미연합 작전체제 구축

동시에 7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 총참모장 겸 육·해·공 3군 총사령관에 전격 임명했다. 정 총참모장은 임명 당일 대전에 위치한 ADCOM를 방문해 처지 준장과 국군의 재정비, 탄약과 장비의 재보충, 한미 양군의 작전지역 분담, 장차전의 작전구상 등 향후 대응책에 대해 협의를 했다. 특히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상황에 대해 미 24사단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서부지역 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경부국도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중부와 동부전선을 담당하기로 지역분담을 했다. 이 회의는 역사상 최초로 한미연합작전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전쟁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됐다.

한편 7월 2일 주일 미 육군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도착 즉시 북상했고, 이 대대를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부대’ 또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Smith TF)’로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들은 북한군에 대해 자만심을 갖는 분위기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다. 같은 날 미 제24사단 예하 제34연대가 도착했고, 4일에는 제21연대와 제19연대가 축차적으로 한반도로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은 한강방어선 전투가 치열하게 교전하던 때였다. 그리고 미 제25사단은 7월 10일 부산으로, 미 제1기병사단 18일 포항으로, 미 제7사단은 증원부대로 인천으로 인천상륙작전 시 투입돼서 주일 미군 4개 사단의 투입이 완료됐다.

한강방어선전투의 국군부대 전투요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한강방어선전투의 국군부대 전투요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국군의 전시 재편성과 미 지상군의 투입전개

국군은 7월 5일 평택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모태로 제1군단사령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한강방어선전투에서 혼성으로 편성돼있던 6개 사단(혼성 수도·제1·2·3·5·7)을 3개 사단(수도·제1·2)으로 재편성해 제1군단사령부의 예하부대가 됐다. 국군은 1개 군단, 5개 사단(수도·제1·2·6·8), 3개 연대(기갑연대·제23연대·17연대)로 개편됐다. 초대 제1군단장은 김홍일 소장이 임명됐다. 육군의 과감한 전시개편은 신임 정일권 총참모장의 결단으로 이뤄졌으며, 야전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체계적인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편성과 체계를 갖췄으나 미군으로부터 무기와 장비의 보급이 안 된 상태에서 전투력은 여전히 약한 상태였다.

7월 5일 미 제24사단의 제34연대가 오산으로 진출한 스미스부대의 후속부대로 평택-안성에 전개했고, 국군 제1군단도 재배치명령을 받고 미 제24사단의 ‘전투협조점’에서 중동부전선 쪽으로 긴급히 배치됐다. 7월 6일 수도군단이 진천으로, 제1사단을 음성으로 전개해 제6사단 제19연대와 제6연대를 작전통제하고, 제2사단을 증평으로 이동해 군단예비부대로 집결 보유했다. 이 시기에 한미연합 방어전선이 골격을 갖추게 됐는데 이러한 시간은 한강방어선 전투의 6일간의 성공적 방어가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유엔사령부의 창설이 7월 7일 거행됐으며, 8일에는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돼 대한민국은 전시체제로 전환됐다.

▶️9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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