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맥아더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6.25전쟁 이야기] 맥아더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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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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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7> 

처지 준장의 전황파악의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 및 신속한 보고

북한 김일성이 기습남침계획을 세울 때 고려한 여러 변수 중 가장 중요시한 것은 미국의 개입(engagement)이었다. 남침 세부계획을 작성하는데 군사고문단의 입장에서 북한군을 지도한 소련은 미국의 대응이 있겠지만 군사적인 개입은 상당히 지연될 것으로 판단했고, 그 사이에 남한 전역을 신속하게 석권(席卷)하면 된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참전했고, 애치슨라인은 고려하지도 않은 기적 같은 일이 미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신속하게 진행됐다.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 하달된 ‘지령 제1호’에 따라 처지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전방지휘연락단(ADCOM)을 조직(13명), 27일 19시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주한 미 고문단의 지휘와 한국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전격적으로 수행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미 지상군 지원’이라고 대서특필해 전선에서 패퇴하는 국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의지를 고양하는 것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8일 04시 미 군사고문단 하쓰렛쓰 대령이 ADCOM에서 처치 준장을 만나서 전반적인 전황(戰況)과 서울에 진입하기 시작한 북한군의 공세 등 상세한 보고를 했다. 곧바로 처치 준장은 채병덕 총참모장을 찾아가서 미 해·공군이 직접 한국군을 지원하게 됐다는 맥아더 장군의 신속한 조치를 알렸다. 또 방어능력을 상실한 한국군에 대해 우선 서울에서 시가전(市街戰)을 계속해 시간을 벌 것과 패주해온 병력을 수습해 부대를 재편성하고, 이 부대를 한강이남선에 배치해 한강선을 사수(死守)할 것을 지도했다. 이에 국군 지휘부는 패잔병을 집합시켜서 28일 하루 만에 장교 1000명과 사병 8000명을 수개의 대대로 재편성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처지 장군의 적시 적절한 전쟁지도는 당시 ‘신(神)의 한 수’였다.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24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24

미 공군과 해군의 신속한 지원

맥아더 장군의 극동군사령부 예하 미 극동공군은 ‘지령 제2호’에 따라 28일부터 본격적인 한반도 작전을 개시해 29일에는 무려 172회의 출격을 했다. 지상군 참전이전에 선 조치된 매우 중요한 지원전투력이었다. 당시 주일 미 제5공군은 9개 비행단으로 편성돼 있었고, 규모는 1172대였지만 가용대수는 350대로 가동률 30%수준이었다. 주력기들이 일본 북부지역에 전개돼있었기에 출격가용편대는 4개 편대에 불과했다. 미 합참의 특별조치로 전투기 F-51 145대를 탑재한 항공모함 ‘보크샤호’를 급파해 전력을 보강했으며, 보크샤호가 태평양을 8일 7시간 만에 횡단한 것(통상 14~16일 소요)은 신기록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미 극동해군은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순양함 ‘츄나우호’를 28일 출동시켰다. 29일부터 강릉-삼척간의 200㎜ 함포로 동해안 7번도로 상에 산사태를 일으켜서 도로를 차단해 남진을 막았다. 이러한 미 해·공군의 신속한 한반도 전장 투입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맥아더 장군이 25일 21시 35분(한국시간) 제출한 상황보고서와 트루먼 대통령이 참여한 26일 21시(워싱턴 현지시간) 제2차 미 국가안보회의(NSC)의 결정이 매우 빠르게 이뤄졌기 때문인데 이 일은 거듭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

처치 준장의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전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기상조건의 악화와 적으로부터의 공격위험성이 있음에도 직접 전선시찰을 결심했다. 해공군의 개입과 지상군의 개입은 같은 무력개입이라 하더라도 그 본질이 다르다. 미 지상군의 개입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라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드디어 6월 29일 06시 10분 비가 오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전용기 ‘바탄(Bataan)호(C-54)’로 한국을 향했다. 맥아더 장군 일행이 탄 ‘바탄호’는 4대의 무스탕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한국으로 이동 중 1대의 북한공군 야크(Yak)전투기의 추격을 당했으나 무사히 10시 39분 수원비행장에 도착했다. 수원비행장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 대사가 정찰기편으로 대전에서 수원으로 도착해 맥아더 장군 일행을 맞이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일행은 처치장군의 전방지휘소(당시 수원농업시험장)와 한국군 육군본부가 있는 임시지휘소(학교)에서 브리핑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낡은 구형 포드승용차를 타고 영등포 동쪽에 있는 한강변의 고지(당시 동양맥주공장의 언덕으로 추정)로 달려갔다. 북한군에 점령당한 강북의 서울과 파괴된 한강교가 눈 아래 보였고, 한강제방을 따라 장비도 제대로 없는 한국군이 적의 공격을 무릅쓰고 열심히 호를 파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맥아더 장군은 혼성 수도사단 제8연대 제1대대 진지로 가서 20여분가량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가 서있던 언덕 근처 진지에서 한국군 한 병사를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눴다. 이때 한국군 병사의 죽음을 초월한 전투정신과 애국심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맥아더는 돌아오면서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국군에 대한 신뢰를 했다고 한다.

‘맥아더 회고록’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날 한강전선을 시찰하면서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반격작전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Tip> 한강방어선 시찰 중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와의 실제대화 

맥아더 :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
국군병사 : 옛!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 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 그 명령이 없을 땐 어떻게 할 것인가?
국군병사 :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 오! 장하군! 자네 말고 다른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국군병사 : 옛! 그렇습니다. 장군님!
맥아더 : 참으로 훌륭하다! 여기서 자네와 같은 병사를 만날 줄을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군군병사 :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 통역장교!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잘 싸우라고.

※필자는 당시 국군병사였던 신동수 옹을 2004년 부산에서 육군군수사령부 장병초빙 강연 시 만나서 직접 이 실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지는 신길동(현 영등포공원)으로 추정된다. (제공: 장순휘 박사)ⓒ천지일보 2020.6.24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지는 신길동(현 영등포공원)으로 추정된다. (제공: 장순휘 박사)ⓒ천지일보 2020.6.24

미 지상군의 신속한 투입결정은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의 합작품

한강방어선 시찰을 마친 후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는 29일 18시 15분 수원비행장을 이륙해 일본으로 행했다. 한국이 처한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맥아더 장군은 수첩을 꺼내 워싱턴에 보낼 정세보고와 건의사항을 메모했다.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는 29일 22시 15분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 복귀했다. 한편 29일 워싱턴에서 ‘지령 제3호’가 하달돼 미 해·공군을 북한군 공격저지에 사용해도 좋다는 승인이 나왔으나 지상군의 사용지시가 없었다. 30일 03시경 맥아더 장군은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미 합참에 보고했다. 그리고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에게 “시간이 중요하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명쾌한 결정을 내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긴급 건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30일 04시 57분에 맥아더 장군이 건의한 1개 연대전투단(RCT)의 전투참가를 즉각 승인하고, 추가로 2개 사단의 투입과 북한 해상봉쇄를 승인하는 동시에 전 세계에 미 육군 투입을 발표했다.

30일 오후에는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결정사항을 보고했고, 유엔 회원국 59개국 중에 33개국이 안보리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훗날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결정을 내리고 난 후 그동안 보낸 7일은 지금까지 재직해오면서 경험한 가장 힘들었던 일주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6.25전쟁 참전결정은 개전 6일 만에 기적처럼 신속하게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미국 내의 정치적 분위기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신속한 참전은 국제평화의 유지와 안전이라는 유엔의 목적과 목표에 기여하고, 안보리 결의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이렇게 미 지상군 참전의 역사적 결정은 30일에 결정됐고, 7월 1일 미 지상군이 한반도에 개입했다.

무엇보다도 맥아더 장군의 한국 전황에 대한 현명한 상황파악은 한국의 패망을 막은 결정적인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미군의 참전 결정은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에게 충격적인 사실이었으며, 과거 소련·중공과의 전쟁모의과정에서 스탈린이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우려하자 김일성이 “미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며, 있더라고 전쟁을 조기에 끝냄으로써 미군의 개입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미군의 개입으로 개전 5일 만에 평양에 대규모 공습이 단행됐고, 6일 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돼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김일성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자 지체 없이 미 제8군사령관 워커(Richard L. Walker) 중장에게 미 제24사단을 파견하도록 명령했고, 제8군사령관은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에게 선견대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B, C중대를 중심으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F Smith)를 편성했다. 스미스부대는 일본 이다츠케 비행장을 이륙해 7월 1일 08시 45분 부산에 도착했으며, 부산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날 저녁인 20시에 부산에서 기차로 출발해 7월 2일 08시에 대전에 도착했고, 처치 장군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들은 후에 오산 북방 죽미령을 지형정찰을 했다. 바로 죽미령에서 7월 5일 07시 30분 북한군과 미군과의 역사적인 첫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죽미령전투’다. 75㎜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해 T-34전차를 공격했으나 북한군은 그대로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보병이 신속히 좌우로 전개하는 보전(步戰)협동공격으로 스미스대대를 포위했다. 이 순간 당황한 미군들은 진지를 이탈해 퇴각했으며 병력 440명중 15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했고, 야포를 포함한 모든 중화기를 피탈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 적 제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李學九) 대좌는 후에 낙동강전선에서 포로가 된 후에 “그때 미군이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들은 바도 없었으며, 오산에 미군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하나의 충격이었다”고 증언했다.

▶️8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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