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

한기팔(1937 ~ )

삶은

경이로운 것.

하늘이

너무 적막해서

꽃 피는 일

하나가

온 섬을 밝힌다.

 

[시평]

한기팔 시인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여든 살이 넘도록 그림을 그리고 또 시를 쓰고 있는 예술가이다.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고, 또 시를 쓰면서 보낸 생애를 되돌아보니, 어쩐지 그 생애가 때론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 뜰에 피어나는 풀꽃도 저 스스로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는데, 나는 저 풀꽃 같은 그림 한 폭, 나 자신만의 그러한 시 한 수를 과연 세상에 내놓았던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더욱 팔십 평생이 부질없이 허망하기만 하다.

봄이 왔다. 원추리꽃이 피었다. 그저 그렇게 보면 아무 일도 아니련만, 꽃이 피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씨가 떨어지고, 그 씨가 흙에 묻혀 햇살과 이슬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싹을 틔우고, 작디작은 싹은 줄기를 세우고 또 새의 작디작은 혀 마냥 작은 이파리를 내밀고, 이내 자기만의 꽃을 피워내는 그 생명, 참으로 경이롭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피어 있는 원추리꽃은 그래서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적막하구나! 그래서 꽃 피는 일 하나가 온 섬을 밝히는구나. 오늘 따라 하늘이 너무 적막해서, 꽃 피는 일 하나로 노시인의 마음도 온통 허허로워진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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