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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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1> 

남북 38도선의 분단획정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전후처리에 있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보장은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영·중의 3자 회의에서 최초로 논의됐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 선언(Cairo Declalation, 1943.11.27)이다. 이 선언에는 ‘한국은 한국인이 처해있는 노예상태에 유의해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in due course)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자유와 독립을 보장한다는 원칙만 명시돼 있었을 뿐, 시행할 순서와 시기, 절차가 명기돼 있지 않았으며, 한국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미·영·소 3국 수뇌의 얄타회담에서 비밀리에 한국문제가 논의됐으며, 1945년 7월 26일에 포츠담에서 카이로 선언이행을 전제로 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이 발표됐다. 문제는 포츠담회담에서 거론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협조였다. 극동아시아에서의 지배력과 미국에 대한 반패권 그리고 부동항(不凍港)을 노리고 있었던 소련은 연합국이 거의 승리로 만들어 놓은 대전말기에 참전의 명분을 획득하는 교활한 술책으로 연합국을 속인 것이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대일전에 참가했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무조건 만주와 북한지역으로 군대를 진입, 점령해 나갔던 것이다. 연합군에 대항해 일본열도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우겠다던 일본이 8월 10일 무조건 항복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전황은 급격히 당혹스럽게 변했던 것이다.

이때 이미 소련은 급속히 한반도를 접수하기 시작한 상황이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그래서 1945년 8월 11일 국무부-육군성-해군성 3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에서 한반도에서의 전후 일본군의 무장해제 작전을 담당할 미국과 소련의 구역 분할선을 북위 38도선으로 획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이 결재는 미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8월 15일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하달돼 '일반명령 제1호'로 발표되면서 미국과 소련 양국이 내면적으로 38도선을 군사점령지역의 경계선으로 할 것을 합의한 공식적인 근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국토분단의 시작이었으며, 전쟁의 불씨를 잉태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미 공산화를 꿈꾸는 자들이 소련을 이용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바로 김일성과 그의 추종세력이었고, 그들의 불장난에 의해 동족상쟁이 발생했고, 3백여만명의 사상자가 희생당했다는 진실(facts)을 알아야한다. 결국 자국의 자유와 독립은 타국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나라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6.25전쟁은 그러한 역사의 교훈을 지금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Tip>'6·25전쟁'과 '한국전쟁'중 어느 용어가 옳은가?

1950 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38도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을 공식적으로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아무 생각 없이 ‘6.25사변’ ‘6.25동란’ ‘한국전쟁’ 등 여러 용어가 혼용돼 왔다. 하지만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용어로서 ‘6.25전쟁’을 공식용어로 확정해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이란 용어는 역사상 한국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 중에서 ‘6.25전쟁’만을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교과서 용어로 채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Korean War(한국전쟁)’로 통용되고 있다. ‘사변’은 ‘전쟁상태에 이르지 않았으나 경찰이상의 무력이 사용되는 난리’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다.

6.25전쟁 직전의 남·북한의 군사력

1950년 6월 24일을 기준한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분석해보면 과연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 병력면에 있어서 약 2:1로 한국군이 절대 열세했다. 그리고 전투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지상군 병력의 자질과 훈련수준인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당시에 북한군은 중국내전에 참전한 동북의용군 3만명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전선에서 싸운 한인계 소련군 5000여명을 편입시켜서 실전경험을 쌓은 전투요원이 전투병력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에는 정규전에 참전한 병력은 일본군 출신정도였다.

남북한 병력 비교.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그리고 훈련수준은 북한군은 소련특별군사사절단의 지도 하에 기초적인 전투훈련부터 시작해 단계적인 교육훈련 과정을 거쳤으며, 전투부대의 최종단계인 사단단위 야외기동훈련을 포함한 보·전·포 협동훈련과 재 부대 합동훈련까지 완료한 상태였으니 이러한 수준유지가 어떤 적을 위한 것이었는지 6.25전쟁은 얘기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군 부대는 전투부대의 24%정도가 대대전술훈련을 마친 수준이었으나 부대에 따라서 중·소대 전술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 취약함을 넘어서 오합지졸의 지경에 있었던 것이다.

장비보유 면에서도 한국군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북한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다. 그 가운데 전쟁초기에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무기였던 전차는 한 대도 없었으며, 화력 면에서도 심대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남북한의 주요 장비 보유수.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장비보유수의 격차뿐만 아니라 무기의 성능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군의 최대 화기였던 M-3형 105밀리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고작 6500미터인데 비해 북한군의 주 무기인 122밀리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 1700미터였으니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군의 포병은 한국군 포병의 사정권 밖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사격이 가능하고 계속할 수 있으므로 절대적인 화력지원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군의 보병사단은 한국군 보병사단에는 없었던 120밀리 박격포를 갖고 있었으므로 산악지대에서도 전천후 화력지원이 가능했다. 기동장비 면에서도 한국군의 차량은 중고 미군차량이라 고장이 잦았고, 보병사단이 보유한 편제차량은 190여대로 52%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각종 장비가 거의 대부분 신제품이었으며 충분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발발한 6.25전쟁은 개전 초부터 한국군의 비극적 패퇴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이 작성한 3단계 작전계획 상황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북한군이 작성한 3단계 작전계획 상황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북한군의 기습은 계획된 것이었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38선 일대에는 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서울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이따금 소나기가 내려 전형적인 장마철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04시에 38선상에 배치된 북한군의 포 600문과 박격포 약 1000문이 사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민족사의 비극은 그렇게 잠든 새벽에 동족의 피를 부르며 시작됐다. 갑작스런 기습에 심각한 피해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국군은 방어진지에서 전투태세로 들어가서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전선사수를 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의 진지는 38선상을 연해 설치된 임시진지로서 육군본부의 방어계획에는 A(알파)선으로 명칭 되는 경계진지가 있었고, 주진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고려한 선형진지로서 임진강 남안-고랑포리-초성리-양문리-가평북방-춘천북방-주문진 북방을 연하는 선이었다.

주진지라고 해야 일부만 콘크리트로 축성이 됐고, 대부분 굴토식의 진지였다. 대전차무기가 없었으니 대전차진지가 없었고, 지뢰지대도 없었고 대전차 장애물도 없었으니 대전차 200여대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감당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국군의 방어계획을 보면 유사시 38선에 배치된 사단으로 적의 침공을 최대한 저지시키고, 38선상의 경계진지(A선)에서 가급적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이 시간을 이용해 주진지에 병력배치를 완료한다. 주진지선은 임진강 남단-춘천-주문진 북쪽(B선)으로 한다. 그리고 남부의 3개 사단을 투입해 가장 위험한 적부터 차례로 반격해 38선을 회복한다고 계획돼 있었으나 계획상에 이미 전면전을 배제한 국지전이나 제한적인 도발수준을 고려한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38도선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기동을 하는 인민군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38도선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기동을 하는 인민군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14

개전초의 상황을 육군본부 상황실에 접수된 보고를 중심을 분석해보면 06시경 옹진반도에 있는 17연대가 “연대는 북괴군의 공격을 박고 괴멸상태에 놓여있다”는 긴급전문을 받은 상태였고, 08시 30분경에는 의정부정면의 제7사단으로부터“사단 정면의 적은 맹렬한 포병화력의 지원 하에 총공격을 개시한 것 같다. 적은 이미 주진지로 돌입했다. 긴급증원을 바란다. 다른 정면도 같은 상황인 것 같다”는 처절한 보고가 들어온 상황이었으니 당시 국군의 당황한 정도는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게 북한군은 기습남침을 위해 철저한 보안유지 하에서 전쟁을 준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황이다.

25일 09시 30분 육군본부에 나타난 채병덕 총참모장은 신중하고 총체적인 전황파악을 했어야하나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해 38선을 회복하겠다는 판단으로 후방의 제2사단, 제5사단, 제3사단을 서울로 집결 시켜서 조기 반격을 하고자 했으나 부대의 이동이 결코 쉽지 않았고, 공격하는 북한군은 과거에 38선상에서 교전하던 적과는 전혀 다른 적이었으며, 전차를 동반하고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고, 공군의 엄호까지 받고 있는 중무장한 정예군이었던 것이다.

38선상에서 국군의 초기전투와 서울 함락

옹진반도에 배치됐던 국군 제17연대는 25일 04시경 약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 후에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대와 제3경비여단의 기습을 받아 지리멸렬 패퇴를 하던 중 철수시키기로 하고 26일 아침에 생존병력 1750명을 철수시켰다. 개성지역에서는 제1사단 제12연대가 휴일을 맞아서 외출외박휴가를 허용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아서 편제병력의 50%수준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개성 북방에 위치했던 국군 제12연대는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의 협공을 받아서 09시 30분경 개성을 피탈당하고 철수했다.

고랑포지역에서는 국군 제13연대가 제203전차여단(T-34전차 40대)이 지원하는 북한군 제1사단의 기습을 받고 전선에서 밀렸으나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90명 정도의 국군용사들이 적 전차에 육탄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용감하고도 비장한 호국용사라고 생각한다. 어떤 용사는 박격포탄을 몸에 지니고 돌진했고, 어떤 용사는 포탄을 들고 전차궤도 밑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용사는 전차의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이들 전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애국심의 고귀함을 일깨운다고 할 것이다.

의정부지역에서는 북한군 제4사단의 기습을 받은 국군 제7사단은 08시경 38선상의 경계진지를 피탈 당했고, 제1연대가 전차에 의해 돌파를 당하면서 적 보병에 포위돼 철수가 불가피했다. 철수 중에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에 많은 피해를 받았다.

춘천지역에서는 서부전선과 다른 전투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국군 제6사단의 용전분투가 있었다. 공격하는 북한군 제2군단은 조기에 춘천을 점령하고 서울 또는 원주방면으로 우회기동 공격하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적이 공격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을 금지시켰고, 이에 전원 전투에 배치가 가능했던 국군 제6사단을 북한군 제2사단이 공격을 했으나 수리산과 소양강의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한 방어에 북한군을 춘천을 점령할 수가 없었다. 한편 북한군 제7사단은 국군 제2연대를 격파하고 홍천을 향해 국군 제6사단의 배후를 위협했으나 국군 제6사단의 철저한 방어전투력 발휘로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홍천지역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27일 국군 제6사단은 육군본부로부터 38선상의 좌우전선의 조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던 가장 위대한 전승이었다.

6.25전쟁 초기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버텨준 3일간의 전투는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차질을 초래하게 했으며, 서울의 조기 포위를 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켜서 29일 맥아더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을 가능하게 했고, 이승만대통령과 한국정부의 안전한 후방으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춘천전투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전투라는 의미로 ‘춘천대첩’이라고 명명해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춘천시에서는 2000년도에 소양강가에 ‘춘천대첩평화공원’을 건립해 시민의 긍지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전쟁발발한 당일 서울은 아침에 새벽에 내리던 비도 그쳤고, 150만명의 시민은 평상시와 같은 일요일을 맞았으나 10시경 갑자기 거리에서 “국군장병은 즉시 원대로 복귀하라”고 외치는 군용 지프차의 가두방송이 시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25일 오후에는 북한정찰기가 서울 상공에 출현했고 라디오뉴스에서는 “북괴군은 옹인-개성-장단-동두천-포천-춘천-강릉 등 38선 전 지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개시하고 동해안에서는 상륙을 기도했다. 아군은 이것을 도처에서 저지하면서 적절한 작전을 전개 중에 있다. 동두천 정면에서는 적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지만 아군은 이것을 격퇴시켰다.”는 식의 허위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방으로부터 후송돼오는 장병으로부터 듣는 얘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서울로 밀려드는 피난민들로 시내의 치안 질서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방송으로 듣던 뉴스가 허위보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우왕좌왕 혼란이 가중됐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갑작스런 기습남침으로 인한 전쟁이 문제였지만 초기 정부의 무책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허위방송을 한 것이 더 큰 문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거짓정보로 인해 서울시민의 피해가 컸으며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후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은 3개월간의 공산당 치하에서 폭정에 시달려야 했고, 우익 인사들이 숙청을 당하는 고통에 신음해야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그야말로 추풍낙엽과 같이 제대로 방어전투도 못해보고 3일 만에 함락되는 불명예를 기록한 것이 개전초의 전투상황이었다.

▶️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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