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정치의 사법화(juridification of politics)’란 정치권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 정치과정이 아닌 사법과정으로 해법을 모색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정치권을 넘어 국가의 정책결정이나 시민사회단체까지 포함할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란 말도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2000년대 후반부터 이런 말이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해 유럽, 남미 등에서도 오래 전부터 자주 논란이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이뤄졌던 주제이기도 하다.

최근의 한국정치를 보면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아니 정치는 없고 ‘정쟁’만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적 갈등이 있는 이슈마다 툭하면 검찰이나 헌재에 사건을 넘기기 일쑤다.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해법을 묻는 방식이다. 불가피하게 검찰과 헌재를 거쳐야 할 사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치과정으로 풀 수 있는 문제다. 그럼에도 ‘닥치고 고발’ 행태가 너무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화와 협상’이라는 의회주의 원칙이 아예 폐기된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지난해 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국회 패스트트랙 논란에서 국회사개특위의 사보임 문제는 전형적인 ‘정치적 쟁점’이었다. 그러나 타당성 여부가 검찰에 고발돼 사법부의 판단을 물었다. 국회운영에 대한 국회의장의 권한 문제도 헌재에 고발돼 사법부가 그 판단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최근에는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 창당과 관련해 민주당이 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검찰에 고발했다. 물론 위성정당 창당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과연 위계 등으로 선거를 방해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검찰에 고발될 사안인지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치권이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굳이 삼권분립이나 의회민주주의 같은 말을 하기조차 부끄럽다. 선출된 권력의 저급함과 추태 앞에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정치의 사법화 수준이 극단으로 치닫자 검찰과 법원도 ‘정치적 중립’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무소불위의 ‘밥그릇’을 놓고 정치권력과 싸우는 검찰의 행태는 낯익은 풍경이다. 거래의 상대가 다를 뿐 지금껏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철밥통’을 키워왔던 검찰이었다. 그 싸움의 과정에서 ‘정치검찰’의 아류들이 대거 양산됐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검찰과 싸우면서 또 정치권력과 교감하면서 ‘정치판사’도 다수 배출됐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물밑 힘겨루기 속에 일부 변호사들까지 가세해서 최근 다수의 법조인들이 정치권에 진출했다. ‘사법의 정치화’가 본격화된 모양새다.

최근 역대급으로 진행되고 있는 법조인 인재영입은 그 도를 넘어섰다. 그렇잖아도 법조인 출신이 너무 많은 지금의 정치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에 여야가 대거 법조인을 영입하면서 법조인 과잉 논란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 검사나 판사로 있던 인사들이 마침 21대 총선 타이밍을 포착해 대중영합의 사건이나 발언을 했다며, 또는 무슨 책을 냈다며 여론의 주목을 받은 뒤 정치권 인재영입에 합류하고 있다. 이쯤 되면 현직 판사나 검사에 대한 신뢰는커녕 그들 언행에 대한 정치성향부터 살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계 진출을 위한 ‘예비적 작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정치편향성이 논란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거대한 정치변동은 검찰과 사법부의 취약했던 중립성 가치를 통째로 흔들었다. 그리고 뒤이은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과 맞물리면서 정치권력과 검찰권력이 충돌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검찰권력 자체가 이미 정치판으로 이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검찰권력이 정치권과 여론을 좌우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검사와 판사들, 변호사들까지 가세하면서 사법의 정치화 경향이 대세를 이룬 셈이다. 그 결과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동시에 21대 총선이라는 최적의 타이밍과 맞물리면서 법조인이 대거 정치권에 영입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치가 실종된 정치권, 법치가 무너진 법조계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생하는 양상으로 내밀하게 손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공생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후진국 정치의 전형에 가깝다. ‘정치실종’의 대표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일부 사례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진성과 권력에 밀착된 검찰 그리고 사법부의 편향성은 곧 독재권력의 토대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괴물’이 되었다. 어쩌다가 한국마저 그것도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통합이며 의회는 그 공간이요 민주주의는 그 바탕이다. 결국 대화와 타협 없이는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공간에 법조인들이 다수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대화와 타협 보다는 정쟁과 대결, 고소 고발이 더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회가 딱 그 모습이다. 그렇다면 21대 국회에서도 이런 추세라면 미래는 더 비극적이다. 게다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벌어질 무한정쟁을 생각하면 솔직히 우리의 미래마저 불안하다. 법조인 출신들이 그 선두에서 온갖 궤변과 법리를 들이대며 얼마나 무차별적인 고발전을 벌일 것이며 싸움질을 선동하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정치의 수준이요, 동시에 국민의 수준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데는 달리 비판할 이유도 없다. 국회 위상이 민의의 전당은커녕 법정(法廷)의 하위개념으로 치부된다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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