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상품의 방대한 축적(accumulation)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마르크스(K.Marx)가 1867년에 쓴 ‘자본론’ 제1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상품에서 노동으로, 노동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끝내는 착취와 공급과잉으로 자본주의적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찌감치 ‘사회주의 길’을 걷던 소비에트는 붕괴됐으며 모순에 가득 찼던 자본주의는 ‘수정’의 길을 통해 더 강력한 ‘자본주의 천하’를 이뤄냈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자본론’ 출간 이후 100여년 만에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강타한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전망은 명확하게 엇나갔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기초와 시대적 경고마저 모두 틀렸다고 보는 것은 과잉이다. 축적된 거대한 자본은 부의 편중을 갈수록 극대화 시켜가고 있으며 노동은 갈수록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노동을 하더라도 그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轉化)되는 방식이라면 ‘부익부 빈익빈’은 운명처럼 보일뿐이다. 그리고 법과 제도, 도덕과 상식마저 그들의 편이라면 자본은 이미 ‘물신(fetishism)’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적 자화상’이다. 비록 마르크스는 틀렸지만 그의 고민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제구호개발기구인 ‘옥스팜(oxfam)’이 지난 20일 다보스포럼(WEF)을 앞두고 ‘연례 불평등 보고서’를 공개했다. 내용을 보면 이미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꽤 충격적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최상위 억만장자(슈퍼리치: 10억달러 이상) 2153명이 가진 재산(8조 7000억달러)이 세계 하위 인구의 60%(46억명)가 가진 재산(8조 2000억달러)보다 5000억달러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이러한 빈부격차는 갈수록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만들어질 때부터 매일 1만달러를 저축해도 가장 부유한 슈퍼리치 5명 자산 평균의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설명한 대목도 흥미롭다. 부의 편중 속도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슈퍼리치를 비롯해 거대자본에 대한 과세율은 낮고 그들이 챙겨가는 배당금은 해마다 늘고 있으니 빈부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노동의 대가는 불과 몇 퍼센트 오를 뿐이다. 특히 옥스팜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명의 남성은 아프리카 전체 여성보다 더 많은 부를 보유하고 있다며 경제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빈곤층 여성(15세 이상)은 매일 125억시간 동안 ‘무급 돌봄노동(unpaid care work)’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이들의 돌봄노동 가치는 10조 8천억달러로 추산되지만 그러나 터무니없이 평가절하 되고 있다며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녀와 여성들에 대한 불평등 치고는 너무 가혹하지만 슈퍼리치의 배당금과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 소녀와 여성들의 희생 없이 슈퍼리치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미국 대선에서 샌더스(Bernie Sanders)가 지금도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미국의 양극화 수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상위 0.1% 억만장자의 재산이 하위 90%의 재산과 맞먹는다며 ‘정치혁명’을 외치는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샌더스에게 미국의 청년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미국의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일 것이다. 자칭 사회주의자에 대한 청춘들의 찬사, 세계 최강 미국이 직면한 위기의 표상이며 동시에 세계 각 국을 향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경고음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상황도 이런 경고와 크게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경제지표가 비교적 좋다고는 했지만 저소득층의 실질소득은 여전히 악화되고 있다.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해 1분기 하위 20%(5분위 중 1분위) 2인 이상 가구 소득은 월평균 128만 7000원으로 역대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상위 20%(5분위) 소득은 역대 최대 폭으로 늘어났다. 소득 양극화 속도가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표방했지만 그 성과마저 대부분 상층부의 몫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요즘엔 어딜 가든 휑한 뒷골목 풍경이 이젠 낯설지도 않다. 불과 몇 년 만에 더 악화된 느낌이다. 소득이 줄었으니 소비도 줄어 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약간의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서울 특정지역에 집을 사려는 수요는 폭증했다. 그 때문인지 서울 일부 지역의 아파트 값이 불과 1년여 만에 수억원이 올랐다. 반대로 수도권 외곽과 지방은 오히려 거꾸로 갔다. 아파트 가격만 놓고 봐도 양극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이처럼 일부 지역이나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이 ‘루저(loser)’가 되는 사회라면 ‘공정’이니 ‘균형’이니 하는 말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노동’인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겠는가. 병상에 있는 삼성 이건희 회장은 최근 주식만으로도 한 달 만에 2조 원을 벌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비유가 잘 못된 것일까. 공정과 균형 그리고 정의, 지금 우리는 그 허황된 담론을 경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때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서문에서 “페르세우스(Perseus)는 괴물을 추격하기 위해 도깨비 감투를 써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도깨비 감투를 눈과 귀 밑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우리도 그런 가면을 벗고 눈과 귀를 크게 열어야 한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양극화의 유령’, 세계는 물론 우리에게도 거대한 재앙으로 들이닥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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