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2019년 12월 21일에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 2007년, 2016년에 이어 세 번째 방문이다. 2017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여행’ 책도 낸 터라 내심 심층 방문을 기대했다.  4블록에서 현지 가이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연혁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인(聖人) 콜베 신부(1894~1941)의 순교도 곁들였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독일군은 탈옥수와 같은 막사 동료 중 10명을 무작위로 뽑았다. 탈옥수 발생 시 동료 10명을 굶겨 죽이는 게 수용소 규칙이었다. 그런데 뽑힌 10명 중 한 명이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저는 죽기 싫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는 폴란드군 중사 출신 가요브니체크였다.  

그러자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라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였다. 독일군 장교가 의아해서 ‘왜 대신 죽으려 하냐’고 물었다. “저는 아내도 자식이 없습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콜베 신부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 난민을 위한 쉼터를 꾸렸고. ‘성모 기사’라는 잡지를 100만부 발행해 폴란드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1941년 2월 17일에 나치 비밀경찰은 콜베신부를 체포하여 파비악 형무소에 가두었다. 5월28일에 콜베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감되었다. 수용자들은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았고 이름은 사치였다. 콜베 신부는 ‘16670’이라는 죄수 번호가 붙여졌다. 7월 20일에 콜베신부는 농사일을 하는 14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수감자 한 명이 건초더미에 몸을 숨겨 탈출하여 7월 29일에 콜베신부 등 10명이 아사(餓死) 감방에 이감됐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방에서 콜베신부는 수감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고 “당신은 내일 낙원에 있을 겁니다”라며 동료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 등 4명은 2주가 지나고 죽지 않았다. 8월 14일에 독일군은 콜베 신부 등 4명에게 독극물인 페놀을 주사했다. 이튿날 성모 승천 대축일에 콜베 신부는 한 줌 재가 됐다.

한편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6월 7일 그가 최후를 맞은 11동 18호실 감방을 찾아 기도했다. 그리고 1982년 10월1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의 시성(諡聖) 미사를 집전했다. 이 날 교황은 82세 노인이 돼 참석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가요브니체크를 끌어안고 뺨에 입 맞췄다.

2016년 7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도 콜베 신부가 수감된 지하 아사감방을 찾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몇 분의 침묵으로 콜베 신부의 숭고한 죽음을 애도하며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다크투어를 하면서 콜베 신부가 아사한 감방이 몇 동인지를 동행한 수용소 직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11동이란다. 11동은 맨 끝 경비초소 근처인데, 단체관람이라 대오를 이탈할 수 없었다. 크라쿠프로 가는 관광버스에서 콜베 신부가 좋아했던 성경 구절을 읽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2~13절).”

금년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자. 아픈 역사를 잊으면 인종차별이 또 다시 세상을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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