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600년 11월에 선조는 류성룡의 직첩을 돌려주었고, 1601년 12월에는 서용(敍用)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류성룡은 조용히 물러나서 말년을 보내도록 해달라고 선조에게 청했다. 1601년 10월에 류성룡은 청백리로 뽑혔다. 영의정 이항복이 그가 부패 관리라는 오명을 씻어 주기 위해 추천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서애청백’ 글에서 류성룡의 청렴을 적었다. 여기엔 정경세가 서애의 아들 류진에게 써 준 시가 있다. 

 

하회 마을 집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서책뿐이니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십여 년 동안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후손에게 물려줄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도 없었던가.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란 말은 촉한의 제갈공명이 임종 시 후손에게 남겨준 재산이 ‘척박한 땅의 뽕나무 팔백 주’란 데서 나온 말이다. 

1604년 3월에 선조는 류성룡의 관직을 복구했으며, 7월에 호종공신 2등에 책봉했다. 8월 6일에 류성룡은 공신록에서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상소했다. 1607년 5월에 류성룡은 66세로 별세했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했다. 5월 13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사신은 논한다. 도성 각 상점의 백성들이 모두 묵사동(墨寺洞)에 모여 조곡(弔哭)하였는데 그 숫자가 1천여명에 이르렀다. 
(중략)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지금 재상된 자들이 모두 이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모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그랬다. 조선 백성들은 불쌍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 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 참으로 치욕이었다. 더구나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와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환향녀(還鄕女)’란 말도 이 때 생겼다. 이는 징비(懲毖)를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 때 뿐이었을까.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한 이후 순조·헌종· 철종까지 60년간 안동김씨 등 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매관매직은 일상이었고, 수령·아전의 수탈은 승냥이 보다 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1863년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왕권 강화책이었다. 1873년에 고종이 친정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은 더 부패했다. 민왕후의 척족 때문이었다. 1894년에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전봉준이 주동한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에 전주성을 점령했다. 당황한 고종과 민왕후은 청나라에 군대 지원을 요청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부패한 청나라는 일본에 힘없이 패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결국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10년에 조선은 망했다.  

조선이 왜 망했나?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들이 반성은 안 하고, 사리사욕에 빠져 무능·부패한 탓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나라를 이끄는 정치가들은 진실로 국민을 생각하고 있나?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나? 아니면 정권욕에만 빠져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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