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조선, 부패로 망하다
[역사이야기] 조선, 부패로 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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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 1882년 임오군란, 1894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농민봉기가 왜 일어났나? 부패(腐敗)때문이었다.

전라도 강진에 유배 중인 정약용(1762~1836)은 1810년경 흑산도에 유배 중인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했고, 1817년에 방례초본 (나중에 경세유표로 바꿈)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세상이 털끝 하나까지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금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다.”

또한 1821년 봄에 쓴 ‘목민심서’ 자서(自序)를 읽어보자.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고, 이후 헌종, 철종까지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권력독점은 매관매직으로 이어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수령과 아전들은 백성들을 수탈했고,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의 삼정(三政)문란이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1862년에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났다. 2월 4일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한 민란은 2월 14일 진주, 3월 27일 익산, 4월 16일 함평, 5월은 충청도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3개월 사이에 경상도 19개, 전라도 38개, 충청도 11개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당황한 안동김씨 정권은 5월 하순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마련해 윤 8월 19일에 공포했다.

첫째 전정에서 모든 부가세와 도결을 철폐한다. 둘째 16세 미만과 60세 이상의 장정에게는 군역세를 거두지 못한다. 셋째 환곡을 없애고 토지 1결당 2냥씩 부과한다. 미흡하지만 전향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농민항쟁이 조금 수그러들자 개혁안은 반포된 지 석 달 만에 폐지됐다. 지배층이 이권(利權)을 포기할 리 없었다.

1863년 12월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집권했다. 대원군은 외척 정치를 청산하고 호포제와 사창제 등을 실시해 농민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조선 왕조를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10년간의 대원군 집권이 끝나고 1873년 11월에 고종이 친정하자 이번에는 민씨척족들이 판을 쳤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적었다.

1873년 11월에 친정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돈을 물 쓰듯 썼다.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국고를 일 년 만에 탕진한 것이다. 국고 모으기는 어렵지만 쓰기는 너무 쉽다.

“원자(순종)가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과 중전이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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