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598년 11월 19일에 파직 당한 류성룡은 20일에 서울 도성을 떠났다. 그런데 11월 23일에 류성룡은 급히 고향 집에 사람을 보내서 양식을 가져오게 했다. 안동 내려갈 노자(路資)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12월 6일에 서애 류성룡은 삭탈관작 되었다. 그의 관직과 이름은 기록에서 아예 지워졌다.

안동으로 내려온 류성룡은 1599년 2월부터 옥연정사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일체 사절했다. 경상감사 한준겸이 찾아오겠다고 전갈이 왔지만 사양했다.

1600년 1월에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소나무를 심었고 5월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서애가 송죽을 심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송죽의 절개를 되뇌고 싶어서였을까?

이즈음 류성룡은 임진왜란 회고록을 썼다. 마침내 그는 1604년에 책을 탈고했다. 책 이름도 당초에는 ‘난후잡록’이라 했는데 ‘징비록’으로 고쳤다. 7월에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을 썼다. 여기에는 ‘징비록’을 쓴 사연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징비록(懲毖錄)’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중략) 아! 임진년의 전화는 참으로 참혹했다. 수십일 사이에 한양·개성·평양 세 도읍을 상실하였고 팔도가 와해되었으며 임금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지금과 같이 평화를 되찾은 것은 하늘 덕분이다. (중략)

시경(詩經)에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라고,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이란 구절이 있다.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처럼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기울어지는 기틀을 바로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하인 내가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뜻과 나라에 보답치 못한 죄를 빌기 위한 뜻이 함께 담겨있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전쟁준비 소홀과 조정의 분열,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한 관료와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 사례가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와 신립장군의 오만이다. 1591년 2월 왜국에서 귀국한 조선통신사가 선조를 알현했다. 정사 황윤길(서인)이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자, 부사 김성일(동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보고했다. 엇갈린 보고를 하고 나온 김성일에게 류성룡이 물었다. “그대의 말이 황윤길과 다른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쩔 작정이오”

김성일이 대답했다. “나 역시 어찌 왜적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단언하겠습니까. 단지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서 민심이 혼란할 까 보아 그랬을 따름입니다.”

안보가 당리당략에 움직였으니 황당하다. 더구나 선조도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다.

1592년 4월 초하루, 류성룡이 신립에게 물었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그 방비는 충분하나요?”

신립: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류성룡: “그렇지 않소. 왜국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오만한 신립은 4월 28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자결했고,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피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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