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사동궁 양관(寺洞宮洋館)이 없어진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없어지게 되었는지 소개한다.

사동궁 양관의 건립시기와 관련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운현궁 양관(雲峴宮洋館)과 거의 비슷한 구조물인 것으로 볼 때 1908년(융희 2)에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관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의친왕(義親王)의 집무실(執務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서 손님접대도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양관의 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대목이 있으니, 당시 양관을 가기 위한 별도의 구름다리가 건립됐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사동궁이 매각된 해가 1947년인데 바로 이 무렵까지도 양관은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동궁이 매각된 이후 양관의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인데, 이 자리에 정확한 시기는 모르나 중앙예식장(中央禮式場)이 세워 졌다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화재가 발생하면서 양관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비통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그 이후 이 자리에 1955년 11월 12일 대한의사협회(大韓醫師協會) 회관(會館)이 세워 졌으며, 1960년 11월 화재가 발생해 소실되기 까지 5년 동안 서울시 의사회(醫師會)와 함께 사용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종로학원(鐘路學院)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20년 넘게 운영되다가 1984년 종로학원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SK건설빌딩이 들어서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데 사동궁 양관이 있던 자리가 결국 오늘날 빌딩으로 변모했다.

이와 관련해 본래 양관이 있던 자리 앞에 회화나무가 건재해 이곳이 사동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이 사동궁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유일한 흔적이 회화나무인데 이러한 회화나무가 있는 곳도 현재는 휴식처로 변모했다는 것인데, 속리산(俗離山)의 소나무는 국보(國寶)로서 정이품송(正二品松)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고 있는 반면에 사동궁의 산 증인(證人)이라 할 수 있는 회화나무는 오늘날 휴식처로 돼 있다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