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사동궁 발자취를 찾아서(1)
[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사동궁 발자취를 찾아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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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사동궁(寺洞宮)은 현재 관훈동(寬勳洞) 196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던 의친왕(義親王)의 처소(處所)였으나 흔적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는데 먼저 어떤 연유로 명칭이 사동궁이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 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행정구역(行政區域)이 개편되면서 원동(苑洞), 대사동(大寺洞), 하청석동(下靑石洞), 승동(承洞), 탑동(塔洞), 일대가 관훈동 지역에 편입되었다.

이와 관련해 사동궁의 지명과 관계가 깊은 대사동은 그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사찰인 원각사(圓覺寺)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훈동의 유래는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관인방(寬仁坊)의 관(寬)과 훈동의 훈(勳)자를 합쳐서 관훈동으로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사동궁 터의 유래와 관련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연보(年譜)에 1584년(선조 17) 대사동에서 별세(別世)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현재 관훈동 197번지에 해당되며, 근처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인데, 196번지가 사동궁이었으므로 율곡의 처소가 있던 위치와 사동궁이 인접(隣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동궁 양관, 사랑채, 지밀(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11.11
사동궁 양관, 사랑채, 지밀(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11.11

의친왕이 사동궁에서 거주하게 된 과정을 소개하면 1877년(고종 14)생인 의친왕이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郡)으로 봉군(封君)되었으며, 17세가 되는 1893년(고종 30) 연안김씨(延安金氏) 가문(家門)의 후손으로서 선조의 장인이 되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11대손 김덕수(金德修)와 길례(吉禮)를 올린 후에 계동궁(桂洞宮)에서 거주하였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된 이후 1899년(광무 3) 의친왕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1900년(광무 4)에 의친왕으로 진봉(進封)되었는데, 처음에는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에 위치한 웨슬레안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재학중에 중국인으로 오해받아서 백인들에게 폭행당하는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여 이것이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건의 결과로 기존의 웨슬레안 대학교에서 이번에는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로아노크 대학교로 옮기게 되었으며, 1905년(광무 9) 8월에 일본 도쿄(東京)을 거쳐 1906년(광무 10) 4월 귀국하였다.

사동궁은 의친왕의 유학 시절인 1900년대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5천평이 넘는 부지(敷地)에 4백칸이 넘는 규모를 갖추었으며, 특히 1백칸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의 창사루를 비롯하여 많은 건축물(建築物)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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