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사동궁 발자취를 찾아서(4)
[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사동궁 발자취를 찾아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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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흔히 사랑채라 하면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로 활용되는데, 사동궁(寺洞宮)의 사랑채도 그러한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손님이 머물면서 의친왕(義親王)과 담소(談笑)를 나누었던 공간으로 짐작된다.

사랑채와 관련해 의친왕이 193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은퇴당하여 일본 큐슈(九州)에 체류하게 되었을 때, 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이 사동궁에 오게 되면 양관(洋館)은 수행원들이 사용하고 사랑채에서 이건이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사랑채의 규모는 20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랑채의 역사도 해방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사랑채에 조선기원(朝鮮棋院)이 설립되었다는 것인데, 특히 이 과정에서 의친왕의 사위가 되는 이학진(李鶴鎭)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친왕의 사위 이학진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의친왕의 사돈이면서 동시에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던 이기권(李基權)의 아들로서 일본으로 유학하여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바둑사 초창기 시절에 중요한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 김인(金寅), 조훈현(曺薰鉉)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한국바둑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학진은 조남철과 함께 1945년 11월 남산동에 한국기원(韓國棋院)의 전신(前身)인 한성기원(漢城棋院)을 설립했으며, 1948년 5월 의친왕의 적극적인 협조로 한성기원을 사동궁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한성기원은 장소를 사동궁으로 옮기면서 기존의 한성기원에서 조선기원으로 상호명도 변경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사랑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남철은 ‘조남철 회고록’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실질적 기원 주인인 의친왕이 바둑을 두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조남철 역시 의친왕이 조선기원에 들러 바둑을 두었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의친왕은 산책길이라도 나설라치면 으레 기원에 들러 바둑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일흔을 넘긴 연세로 백발이 성성했지만 왕족다운 당당한 풍모의 노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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