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쌓인 순조 인릉 (사진제공: 문화재청)

배산임수와 입지요건ㆍ풍수지리 등 살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시대 왕가의 무덤인 ‘왕릉’은 60여 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유교와 그 예법에 의해 꾸준히 형식이 정비됐다.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만들어진 왕릉은 사후 세계에 대한 내세관과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정신을 담았다.

왕릉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 조영술에 따라 입지를 굳건히 세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백(百) 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어 도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며, 도성을 중심으로 반경 10리(약 4㎞) 밖에서 100리(약 40㎞) 이내가 입지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후릉(정종과 정안왕후)과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寧陵),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을 제외하면 나머지 왕릉은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백(百) 리 안에 조성됐다.

왕릉의 권위는 능역을 통해 더 굳혀진다. 능역은 임금 무덤의 터전으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시설로부터 격리되고, 범위도 차츰 확대됐다. 처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步)가 보통 능역이었으나 태종 때 161보, 현종 때 200보로 늘어났다.

능역 구조도 각종 제례 절차를 수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진입-제례-전이-능침’과 같이 일정한 공간은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왕릉은 자연과 조화되는 것도 중요한 요건이었다. 생전에 자연과 함께 산수를 누렸으니, 죽어서도 자연 속에 묻혀 함께하고 싶은 내세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능역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따라 조영됐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를 따르고, 앞의 조산(朝山)과 뒤의 주산(主山) 등 두 겹으로 둘러싼 산을 경계로 삼아 넓은 녹지를 조성해 왕릉의 입지를 다졌다.

이처럼 사후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왕릉은 세속과 분리된 성역으로 조성돼 엄격하게 관리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현재에 이르러 대도시 서울의 도심과 근교에서 자연생태와 녹지를 제공하고,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27대 왕ㆍ왕비와 사후에 추존된 왕ㆍ왕비의 무덤을 포함해 모두 44기(基)이며, 그중 북한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지난 2009년 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