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동진(東晋)의 영화(永和)9년(353) 3월 3일은 해마다 찾아오는 삼짇날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하루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흥(紹興)의 명사 41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320~385), 손작(孫綽 314~371) 등은 특별한 하루를 만들기로 모의했다. 좌장인 왕희지는 41명의 모임을 ‘군현필지, 소장함집(少長咸集)’이라고 규정했다. 현명하다는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니, 나이를 초월한 모임이 되었다는 감개무량한 표현이다. 입구의 땅바닥에 거대한 서각으로 군현필지를 새겨놓았지만, 나는 소장함집이라는 말이 더 좋다.

난정(蘭亭)을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다. 여운은 깊을수록 길다. 소흥에서 보낸 며칠의 여운은 너무 깊었다. 귀국하자마자 주은래(周恩來) 고거에서 구한 모택동 시집을 만지작거리느라고 한 달이 지났다. 이어서 서위(徐渭), 육유(陸游), 장대(張岱), 하지장(賀知章), 노신(魯迅)에 빠져 가장 보고 싶었던 왕희지의 자취는 뒤로 밀렸다. 그 다음은 왕양명(王陽明)과 황종희(黃宗羲)일 것이다. 크지 않은 도시가 낳은 너무도 강력한 인물들의 자취는 몇 년이 지나야 겨우 겉모습이라도 정리될 것이다.

모두 소흥성을 나와 남쪽으로 향했다. 깊은 산이 있고, 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로 갈 것이다. 왕희지가 주도하는 봄맞이 행사가 열릴 것이다. 육로로 갔을까? 수로로 갔을까? 육로였다면 돌로 포장한 길을 가느라고 나귀발자국 소리가 요란했을 것이다. 수로로 간 사람들은 수편을 나와 배를 탔을 것이다. 한 줄로 갔을까?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갔을까?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을 것이다. 세속의 규범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명사들이었으므로, 일정한 규율이 있을 까닭은 없다. 핏줄로 이어진 사이도 있고, 기질로 얽힌 사이도 있었다. 한가한 구름처럼, 유유한 백학처럼 내키는 대로 살았다.

좌장인 왕희지는 동진 최고의 문벌 낭야왕씨의 준재로 난정에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놀이터를 마련했다. 차석인 사안은 훗날 동진의 국정을 장악하고 불과 3만의 병력으로 전진 부견(付堅)의 100만대군을 비수에서 격파했다. 승전소식을 기다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바둑을 두었다. 이런 인물들이니 내키는 대로 모였을 것이다. 정시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뒷산인 난저산(蘭渚山)을 따서 난저정이라고 불렀던 정자의 이름마저 귀찮아서 난정으로 줄여버렸다. 아무튼 오는 대로 곡수의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술을 가득채운 우상(羽觴)이라는 술잔이 떠온다. 누군가의 앞에 멈추면 시를 지어야 한다.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음악은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가수가 반주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모두 37편의 시가 나왔다.

시집을 내기로 하고 왕희지가 서문을 지었다. 28행, 324자의 유명한 난정집서가 완성되었다. 천하제일행서이자 왕희지를 서성(書聖)으로 만든 작품이다. 당태종이 유일한 부장품으로 삼았다는 에피소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글씨보다 내용이 더 좋다. 단문 가운데는 소동파의 적벽부와 쌍벽을 이룬다.

유상곡수를 흉내낸 신라의 귀족들이 포석정에서 놀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유치한 인식이 우리를 작게 만든다. 국가의 흥망이 풍류 때문인가? 사안은 100만대군의 침입을 앞두고도 바둑을 두었다. 전선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령을 만난 후 돌아와 계속 바둑을 두자고 했다. 궁금했던 손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전쟁에서 이겼다네요. 바둑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손님이 떠난 후 너무 기뻐서 뛰어나오다가 문지방에 걸려 나뒹굴었다. 사안이 문지방을 부순 유래이다. 싸움은 흥분하는 쪽이 진다. 특히 지도자가 흔들리면 위험하다. 김정은의 격장지계에는 무대응이다가, 아베의 격장지계에는 과민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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