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유교국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와 단절하고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것은 지금부터 140년 전 일이다. 바로 쇄국(鎖國)이었다. 대원군은 전국에 ‘서양오랑캐와 교류를 단절 하겠다’는 척화비(1871AD)를 세우도록 했다.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  

대원군은 ‘양이보국책(攘夷保國策)이란 유시(諭示)’를 내리기도 했다. 이 유시에서 마저 각국과의 교역 단절을 천명했다.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그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하략)-

당시 아시아 정세는 극도로 혼란했다. 3백년 대국으로 섬겼던 청국(淸國)의 안보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 같은 일들이 바로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는 집권 첫 시기인 1866년부터 대외관계를 차단했다. 통신사를 보내는 등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일본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에 대해서도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모든 전통적인 교류마저 거부했다. 

당시 일본은 2백년간의 쇄국 정책을 버리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헌법이 공포된 해가 1889년이니 사실은 조선보다 늦게 문호를 개방한 셈이다. 

쇄국정책은 10년 남짓이었다. 이 길지도 않은 시기 조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세계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세계 각국과 통호하고 교류를 시작했으나 국가의 동력은 너무 미미했다. 

조선이 개방을 선언했으나 주류 지식인들에게는 대명의리나 유교적 관습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실학이나 과학적 탐구보다는 유서(儒書)가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계역사서 보다는 사마천의 사기나 사서삼경을 우선 독해하고 외워야 했다. 조선은 더욱 나약해지고 결국은 우리보다 늦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에게 추월당해 국권을 빼앗기고 만다.  

역사를 상기하는 것은 시대의 거울로 교훈을 삼자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집착하거나 매몰되면 새 역사에 대한 적응을 잃을 수 있다. 그것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 작용된다면 협력이나 유대를 지탱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집착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 심한 것은 아닌가. 집권 이후 줄 곳 일본과는 대화를 외면해 왔다. 한·일동맹이란 단어도 흐지부지 됐다. 이것이 혹 일본에 대한 현대판 쇄국조치는 아닌지. 

대원군의 쇄국이 조선의 운명을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듯이 국가가 과거사에 집착, 인국과의 우호 선린의 문호를 닫으면 결국은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 문대통령은 지난 주말 전남도청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상기하며 대일 결전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무역규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 되는 코멘트가 아니다.  

한·미·일 동맹이 와해되는 것을 제일 반길 국가는 바로 북한과 중국이다. 대통령은 비장한 각오로 한·일 간 경제 교착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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