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시대에는 과거합격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과거에 붙었다 하면 권세를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았다. 초시니 진사니 하는 소리만 들어도 에헴 하며 뒷짐을 지고 다녔다. 그러니 선비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과거에 매달렸다. 젊은 나이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 공부만 하다가 늙어 죽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이율곡은 20대 초반에 처음 치른 과거에 장원을 한 수재였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겨우 합격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금수저로 살 수 있었으니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글 잘하는 선비가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슬쩍 바꿔치기 하거나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던 누군가가 대신 답을 적어 머슴을 통해 가져다주기도 했다. 감독관에게 돈을 주어 실력이 안 되는 응시자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기도 했다. 이런 부정 시험을 적과(賊科)라 했다는데, 서울의 양반 자제들이 주로 이런 짓을 했다. 시골에서 죽어라 공부하고 괴나리봇짐을 매고 서울로 과거 보러 온 선비들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는 충격과 좌절에 빠졌을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배경이 없고 돈이 없으면 과거에 합격을 할 수 없으니, 낙담한 시골 선비들은 고향 산천에 묻혀 서당 훈장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을 원망하며 술이나 마셨다. 의협심이 강한 사람들은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며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19세기 초 난을 일으킨 홍경래도 그중 하나다. 그 역시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사마시에 낙제했다.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얻고 그렇지 못한 자는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자신이 평안도 사람이라 제외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조선사회는 출신이 곧 능력이었다. 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비상한 재주를 타고 났어도 양반 집안이 아니면 결코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벼슬을 한번 하면 그 집안 자손들은 벼슬을 한 조상의 공을 인정받아 또 벼슬을 했다. 벼슬이 대물림 된 것이다. 양반가에서는 어느 집안이 벼슬을 더 많이, 더 높이 했느냐에 따라 그 세력이 달라졌기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했다. 모이기만 하면 집안자랑을 했고, 족보를 들추며 죽은 조상의 벼슬을 따졌다. 결혼도 그들끼리 하고 왕래도 그들끼리 했다. 그들만의 리그였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뒤 양반들은 거의 돌아왔지만 일본에 눌러 앉은 이들도 많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나 베를 짜는 직조공,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 등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그랬다. 조선에서는 중인으로 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기껏 하급 관리나 할 수 있었고 그나마 양반 등살에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숨죽여 살았던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그들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마음 놓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으니 굳이 돌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기술은 그렇게 일본에서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거듭났다.     

조선 초기에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지역 사람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고, 중기에는 호남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 호남의 경우 정여립 사건으로 ‘반역향’으로 찍혀 중앙관가에 진출하지 못했다. 후기에는 노론 중심의 기호지방에 밀린 영남이 제약을 받았다. 문벌 학벌과 함께 지연이 조선 사회를 갈랐다. 

조선의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요즘도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다.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게 인지상정이요 인간세상 법도라고는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원망이 생기는 법이다. 경당문노(耕當問奴), 농사일은 당연히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다. 뭐가 됐든, 그걸 잘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자. 그게 공정한 세상이고, 나라 살리는 길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