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동물들은 농장의 주인인 인간을 내쫓았다.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모두 적이며, 동물들은 옷을 입어도 안 되고, 침대에서 자거나 술을 마셔도 안 되며, 무엇보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반란을 주도한 돼지들은 교활했으며, 마침내 인간의 흉내를 내며 동물들 위에 군림했다. 농장은 평등하지 않았고, 동물들의 삶도 고달팠다.

‘그녀(짐수레를 끄는 암말 클로버)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죽는 꼴을 봐야 하는 사회였다. …… 그녀를 비롯해서 농장의 동물들이 바랐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고 허리가 휘게 일한 것도 이런 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TV 동물농장’ 속 동물들은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동물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TV 속 동물들도 다투거나 싸우고, 잡아먹기 위해 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맹렬하게 달리고 달리지만, 또 때로는 갈기갈기 살이 찢겨 포식자의 일용할 양식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물들, 그들의 삶일 뿐, 그래서 우리들은 치킨을 뜯으며 느긋하게 그것들을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동물농장’ 속 동물들은, 그것들이 진짜 동물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무심하게 넘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들 마음이 어지러워지거나 몹시 아파지는, 반갑잖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제국이 마침내 항복을 하고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8월 15일 바로 이틀 뒤에 나온,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옛 소련의 공산체제를 비아냥거렸던 소설 속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토록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TV 프로그램에서는, 개들이 무슨 짓을 할 때는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기 때문이지, 개들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 주인이 그 원인을 알고 잘 대응을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 메시지를 준다. 다 주인하기 나름이라는 얘기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개가 그러하듯, 사람도 뭔가 잘못을 할 때는 말 못할 사연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듯이, 세상에 나쁜 사람도 없는 것일까. 나쁜 정치는 있어도 나쁜 사람은 없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동물의 왕국’ 같은 TV 프로의 인기가 높아졌을 것이다. 귀여운 애완견이 재롱을 부리거나, 개가 사람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물속 고래가 인간들이 감히 흉내도 못 낼 신통방통한 재주를 뽐내거나, 아프리카의 누우들이 떼를 지어 악어가 득실대는 강을 건너거나, 긴팔 오랑우탄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TV 뉴스를 보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코미디언들도 이제는 정치를 풍자하지 않고 정치인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누가 잡아가는지, 누구한테 혼이 나는지, 아니면 재미가 없어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우나, 아무튼 코미디도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꼭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요즘 코미디 프로 인기 없다. 

볼 것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가서, 떼창을 하며 울부짖는 것이다. 위 아 더 챔피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