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국민 시름없는 새해 열었으면
[이재준 문화칼럼] 국민 시름없는 새해 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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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섣달 그믐날을 ‘제석(除夕)’이라고 했다. 또 수세(守歲)라고도 한다. 왜 ‘제석’ ‘수세’라고 했을까. 제석은 글자대로 하면 밤이 없다는 뜻이다. 떠나려는 세월을 잠시라도 잡아보려는 아쉬움에서 지어낸 것인가. 

풍속지에 보면 제석 날 여러 속신이 나온다. 잠을 자면 굼벵이가 된다느니 혹은 눈썹이 센다고 생각해 왔다. 필자도 어린 시절 섣달 그믐날이면 가족 모두가 눈썹이 하얗게 될까 걱정해 잠을 자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이 자는 것을 막기 위해 심청전을 구성지게 읽어 주시곤 했다. 창문이 훤히 밝아 온 새벽에야 잠이 들곤 했다.

이런 풍속은 본래 중국에서 전래된 것 같다. 송(宋)나라 때 글인 ‘쇄쇄록(瑣碎錄)’에 ‘그믐날 밤에는 부처 앞이나 집안 곳곳에 등불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또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이란 책에는 ‘섣달 그믐날 밤 사람들이 집에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아침이 되도록 자지 않는데, 이를 수세(守歲)라 하였다’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현대에도 춘지(春節)에는 제석을 최대 명절로 여겨 밤을 새워 폭죽을 터뜨리며 놀고 마시는 풍속이 있다. 주요 방송국의 연예대상도 제석 프로그램이다. 우리 풍속에 제석에는 자녀들에게 시를 짓게 하여 품평하고 즐거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영조 때 한치명(韓致明)은 전라도 순창 사람으로 문명을 날린 분이다. 그가 아홉 살 때 제석날 밤 부친은 제석시를 지어 보라고 했다. 

- 묵은 해 장차 다하고 새해가 오려하니(舊世將盡新歲至) / 아이들이 기뻐하며 웃고 노인은 슬퍼하네(兒童嘻笑老人嗟) -
어린이의 작시를 보고 가족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그는 장성해 초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으나 대과(大科)에는 오르지 못했다. 학문을 좋아한 그는 고향에 은둔해 후학들을 가르치고 살았다. 제석에는 부모, 스승이나 친구 은인들에게 제석시를 지어 보냈다. 조선시대 남아있는 많은 양의 간찰(서간문) 가운데는 이런 안부 시가 많다. 조선 철종 때 문인 이만용(李晚用)이 다산 정약용의 맏아들 정학연(酉山 丁學淵)에게 제석시를 보낸다.  

- …(전략) 떨어지는 꽃잎처럼 살아온 한평생 한스럽지만/ 세상 모든 것이 멀고도 아득하니 그 무엇도 무관한 일일세… -
이만용은 시문을 사랑해 친구인 정학용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정학용은 추사 김정희의 벗이기도 했는데 일찍이 벼슬을 단념하고 시인들과 교유했으나 건강을 상실해 불행한 만년을 보냈다. 이만용이 보낸 제석시는 불쌍한 친구를 위로한 시다. 
제석에는 또 망년주(忘年酒)를 마시며 밤을 새웠다. 당나라 이태백이 현종에게 바친 시 구절에 그 유풍을 찾을 수 있다. ‘제천정자 위에서 망년회(忘年會)를 열었을 때는 대궐진수가 줄줄이 이어지기도 했다.’ 당나라 풍속이 신라에 전해져 요즈음 망년회로 이어진 모양이다.

오늘 저녁 자정 서울 보신각에서는 제야의 종이 울린다. 33번의 타종은 불가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백성들의 시름과 번뇌를 씻고, 새로운 한해를 축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에겐 얼마나 간절한 염원인가. 지금 대한민국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새해는 국민들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제문제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들의 시름과 번뇌를 해소해주는 것은 대통령과 정부의 제일 의무다.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부정적인 요인들은 제석에 묻어 버리고 희망의 기해년을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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