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군은 국가의 간성(干城)이다.’ 군의 중요성을 지칭한 말로 글자대로 해석하면 ‘방패와 성곽’을 뜻한다. 이런 표현이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에도 나오니 그 역사가 짧지 않다. 

‘씩씩한 무사들이여, 제후의 간성, 방패로다. 강한의 물결 출렁이고 무사들 용감하도다(赳赳武夫 公侯干城 兎罝歌赳赳 江漢詠洸洸).’

명장 김유신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떠나는 김흠순 장군 등에게 간성론(干城論)을 펴면서 독려한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이며 임금의 어금니다. 승부의 결단을 화살과 돌 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인심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다. 그러나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롭다.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조선 초 개국공신 조영무(趙英茂)가 가뭄이 들자 사직상소를 올렸다. 조영무는 무반출신으로 태종을 도와 정몽주 등 반대세력을 제거한 장본인이다. 태종은 조영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간곡하게 만류했다. 

“나는 경을 가물 때에 장마처럼 바라고, 나라의 방패와 성(干城)처럼 믿고 있다. 이 공을 생각해 정승의 자리에 앉힌 게 어찌 나 한 사람의 돌봄이겠는가. 만백성이 함께 보는 것이다. 한발의 재앙으로 인해 갑자기 정승직을 사양하느냐? 재앙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다.… (태종실록 5년 5월 11일… 喩之以霖雨 國倚之以干城 念玆勳功 置諸端揆 豈予一人之有眷 實是萬民之具瞻 何緣旱魃之災 遽辭相臣之職 彼咎徵之斯至 實否德之致然云云…)”

고대 서한(西漢) 시대 장군 주아부(周亞夫)는 흉노를 물리친 명장이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갑옷과 무장을 풀지 않은 장수로 유명했다. ‘제 아무리 높은 분이 오더라도 군영 안에서는 군의 군율(軍律)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언제라도 적을 보면 나가서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속으로는 언짢았지만 주아부를 가리켜 ‘진짜 장군(眞將軍)’이라고 엄지 척을 세웠다.

군을 멸시하면 나라가 위태로웠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나라의 멸망은 문약(文弱)으로 군을 중시하지 않은 때문이다. 결국 황제와 황후가 금나라에 잡혀 가고 격조 높았던 수도 가이펑부(開封府)는 무참하게 파괴됐다. 

고려 정중부의 난은 젊은 문신들에게 노장(老將)들이 모욕을 당한 것이 화근이 되어 나라가 뒤집힌 것이다. 흥분한 수천명의 무사들이 궁성에 들어가 문관 복두(幞頭)를 쓴 관리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고려 30년 무단정치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폐단으로 기록된다. 

조선 태종은 사병의 힘으로 역성혁명을 한 후 이를 해체했다. 고려 군사력이 강했던 것은 바로 사병의 힘이었다. 사병을 그대로 두면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강한 군대를 갖지 못했던 조선은 유아(儒雅)한 것에만 침잠했다가 미증유의 국난을 여러 번 당했다.   

청와대 행정관이 육군참모총장을 커피숍에서 만나 군의 인사문제를 상의한 것이 알려져 일파만파 파장이 커지고 있다. 야당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했지만 부적절한 만남과 청와대 행정관의 인사서류 분실 등 의혹은 커지고 있다. ‘이게 나라냐?’라는 개탄이 나오고 있다. 

군을 비하하면 국가 안위가 위태롭다. 제복을 존중해야 하며 간성으로 예우해야 한다. 복잡다단하게 얽혀가는 안보상항에서 국가와 국민을 보위할 군을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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