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4)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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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95년(정조 19) 12월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정약용(丁若鏞)이 정조의 부름을 다시 받아 무관직인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을 시작으로 10개월이 지난 1796년(정조 20) 10월 규영부(奎瀛府) 교서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관련해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의 역할은 당대의 문신이자 학자 관료들과 능력을 겨루며 온갖 책을 교정하고 임금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사암은 이만수(李晩秀)를 비롯하여 이재학(李在學),이익진(李翼晋),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했다.

그해 12월에 정조는 사암을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제수하고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가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한편 1797년(정조 21) 3월에 성균관 절제(節製) 대독관(對讀官)에 제수되었는데 절제(節製)란 절일제(節日製)의 준말로서 성균관 유생에게 보이던 시험으로 매년 인일(人日), 1월 7일), 상사(上巳), 3월 3일), 칠석(七夕), 7월 7일), 중양(重陽), 9월 9일)에 실시했다.

그러나 사암은 명관(命官)이나 주문(主文)이 아니면 답안지를 채점하거나 가려 뽑는 대독관의 일을 할 수 없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명을 내려 사암에게 많이 뽑으라고 하였다.

채점이 끝난 뒤 합하여 살펴보니 사암이 뽑은 것이 세장이었는데 모두 윗자리를 차지하고 명관과 주문이 뽑은 것은 제4, 제5위를 차지하여 보는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질수록 사암을 시기하는 반대파들의 비방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디.

이러한 상황에서 6월 22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돼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가게 됐으사암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 동부승지의 벼슬을 사양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과 모함을 받았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여 정조에게 올렸으니 이것이 바로 “변방사동부승지소(辯訪辭同副承旨疏)”인데 3000자가 넘는 장문이자 명문의 글이었다.

덧붙이면 사암의 상소(上疏)는 자신이 받는 비방에 대한 생각과 벼슬을 사양하는 내용이지만 스스로 했던 일을 밝혀 비방에 대하여 해명하는 상소여서 자명소(自明疏)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암의 상소가 올라간 이후 사암에 대한 비방 여론은 진정됐으나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상소 한 편으로 해결된 사안은 아니었으며, 결국 정조는 윤 6월 2일 사암을 곡산도호부사로 제수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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