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을묘박해에 연루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된 사실을 11회에서 소개했는데 을묘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사암이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살펴본다.

사암은 1794년(정조 18) 정조의 어명에 의해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적성,마전,연천,삭녕 지역에 대한 감찰 임무를 수행한 이후 동년 12월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도청랑(都廳郞)으로 제수됐으며,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가 됐다가 그 이듬해 정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 되었으니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됐는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서 사암이 비로서 당상관(堂上官)의 반열(班列)에 오른 것을 의미했다.

1795년(정조 19) 2월 사암은 동부승지에서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옮기는데 정조가 사암을 병조참의로 제수한 이유는 수원 화성에서 열릴 예정인 왕실행사의 호위를 사암에게 일임하기 위하여 내린 파격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화성에서 열릴 왕실행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행사인지 소개한다.

동년 윤 2월 9일부터 2월 16일까지 8일에 걸쳐서 정조가 수천명의 수행원들의 호위 속에 한양도성을 떠나서 화성행궁에 머물렀는데 이러한 8일 동안의 일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 할 수 있다.

사암이 왕실의 핵심 행사에 호위 책임자가 됐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윤2월 13일 화성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 열렸던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왕실행사를 성대하게 마친 이후 사암에게 의궤청(儀軌靑) 찬집문신(纂輯文臣)으로 제수하여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찬술(撰述)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화성축조(華城築造)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의미했다.

정조는 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제수한 것을 비롯해 이가환(李家煥)을 공조판서(工曹判書),정약용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제수했으니 이 시기가 남인들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남인들이 을묘박해로 타격을 받았으며, 결국 사암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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