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 우당 이회영(李會榮) 선생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동북아 窓] 우당 이회영(李會榮) 선생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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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이어온 독립운동의 대부들이다. 그는 조선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승 슬하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상설을 수석대표로 거기에 밀파했다. 이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객 신세가 됐다. 1911년 초봄, 압록강 건너 단동에서 동쪽으로 가는 500리 길에는 말 100여필이 얼음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중 한 필에 40대 중반의 이회영(1867~1932)이 타고 있었다. 그는 형들인 건영, 석영, 철영, 아우들인 시영, 호영과 그 식구들 60여명과 함께 서간도로 집단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이회영은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패망에 이르자 국내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형제들을 향해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이제 대한제국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나를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라고 설득한다. 그리하여 모두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하고 만주로 집단 망명한 것이다. 처분한 재산은 40만원, 지금 기준 600억원의 큰 돈이었다. 그들은 이 돈을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10여년이 지난 후에는 모두 빈손이 되어 중국 각지에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첫째 이건영은 만주에서 얻은 병으로 광복 전 타계했고, 둘째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으로 전 재산은 소멸되고, 두 아들은 독립운동 중 전사해 대(代)가 끊긴 채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국수와 비지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외롭게 사망했다. 셋째 이철영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풍토병으로 광복 전에 사망했다. 

형제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넷째 이회영은 망명 후 만주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했고, 1919년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의장에 추대됐으며, 1932년 11월 지린성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인해 일본경찰에 잡혀 뤼순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다. 한편 우당의 아내 이은숙은 독립운동가들을 밥해 먹이고 삯바느질로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1925년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국으로 들어와 고무신 공장에서 일해 받은 봉급과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그녀는 당시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비밀리에 세세히 기록한 책자 ‘서간도 시종기(西間島 始終記)’를 남겼다. 

다섯째 이시영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교섭국장직에 있으면서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조약 거부 주장이 거절당하자 사직했다. 임정시절부터 같이한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1953년 한국전쟁 중에 별세했다. 여섯째 이호영은 만주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 전체가 함께 몰살당해 시신도 찾지 못했다.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은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들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지만,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투쟁을 해온 이회영 일가와 같은 숨은 우국지사가 많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재한 것이다.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을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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