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 북·중 정상회담 역사와 북한비핵화
[동북아 窓] 북·중 정상회담 역사와 북한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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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는 북한의 발전을 위해 특별히 중국과 밀접한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다. 북·중 정상회담이 바로 그 가운데 있어온 것이다. 북·중은 일제강점기와 국공(국민당·공산당) 내전 시기에는 동지였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 혈맹관계를 맺었다. 북·중간의 끈끈한 밀월관계는 1958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인민일보는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김일성도 이듬해 중국 건국 10주년 직전 인민일보에 쓴 글에서 “북·중 양국 인민은 친한 형제이며, 양국 인민의 운명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1961년 북·중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의 체결로 이어졌다. 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지금까지 북한밖에 없다. 이 조약 제2조는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해 전쟁상태에 처할 경우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해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함으로써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하고 있다. 사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미국이 다른 우방국가와 개별적으로 체결한 조약과 마찬가지로 자동개입 조항은 없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으나 90년 한·러수교, 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되자 국가존립의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중수교 직전 북한을 방문한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이 북한의 이해를 구하려고 김일성을 접견했다. 그가 떠난 후 화가 난 김일성은 곧 바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해 오늘의 핵 문제가 비롯된 것이다. 김일성이 1994년에 사망하자 김정일도 핵무장을 강화해 오다가 2006년과 2009년 1·2차 핵실험을 하면서 북·중관계는 소원해졌고, 덩달아 중국의 북한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김정은 집권 이래 2012~2017년 북·중 관계는 최악이었다. 북의 4차례 핵실험·미사일 시험발사와 중국의 유엔 대북제재 동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해 3, 5, 6월 등 3차례 김정은의 방중은 북·중의 갈등 기류를 신 밀월관계로 바꿔놓았다. 세 번째 방문에서 시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이 100일 안에 세 차례 중국에 와서 나와 회담한 것은 중·조 고위급 교류의 새 역사를 연 것”이라고 했고, 김 위원장도 “조·중은 한 가족처럼 친밀하고 우호적”이라고 화답했다. 

지난해 12월 채택한 유엔안보리대북결의 2397호가 대북 원유공급을 연 400만 배럴로 제한하고, 휘발유 등 정제유 제품 공급 상한을 50만 배럴로 제한해 1월 중순 평양 휘발유 값이 L당 2만 6000원이었으나, 갑자기 7월 초 L당 1445원으로 떨어졌다. 이처럼 기름값이 하락하자 미국은 중국이 대북제재의 망을 허술하게 펼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판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번번이 중국이 북한을 조종해 북한비핵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한미, 미중 역학관계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공조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마무리한 후에 북한체제를 보장하고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기존의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로드맵과 북한의 비핵화가 연계돼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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