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의 순애보
[동북아 窓]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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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의 관문이며,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이다. 8월 말경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임원들은 역사기행의 일환으로 ‘바이칼 호수와 백악산 아사달’을 다녀왔다. 이르쿠츠크는 1615년 시베리아 개발에 나섰던 카자크(Kazak) 기병들이 바이칼호의 지류인 안가라 강변에 정착했던 곳인데, 담비 모피가 상품화되자 시베리아의 교역중심지로 발전했다. 19세기 러시아는 여기에 시베리아 총독부를 두고, 극동과 알래스카까지 관할했다. 우리는 거기서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둘러봤는데, 왜 이 도시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지 알 수 있었다.

182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해 12월 14일 새로운 황제는 통치 첫날을 제국군의 충성서약식으로 시작했다. 이때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 싸워 수많은 공적을 세우며 반년 가량 파리를 점령했던 귀족출신 청년장교들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폐지하고 서유럽화 된 러시아를 꿈꾸며 ‘대관식 날’ 황제 암살계획을 세웠다. 이 봉기는 실패했지만, 이는 러시아 최초의 조직적 저항운동의 상징이 됐다. 12월이 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여서 이 사건을 데카브리스트(Decabrist 12월 당원)라고 부른다. 

취임한 니콜라이 1세는 거사 관련자 500여명의 장교 중 주동자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1명을 중노동형에 처해 이르쿠츠크로 유형 보냈다. 유형길에 오른 데카브리스트 중 18명은 기혼자들이었는데 남편과 이혼하면 귀족 신분을 유지해 주겠다는 니콜라이 1세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11명의 여인들은 동토의 땅으로 남편들의 유배행렬을 따라갔다. 황제를 암살하려 해서 러시아제국의 적이 됐지만, 그들 중 일부는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대귀족 가문의 장교들도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세르게이 볼콘스키로, 그는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 영웅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회유에도 그 또한 결국 시베리아행을 택했다. 

볼콘스키 공작의 부인은 마리아였다. 그들 부부의 한 살짜리 아이는 시베리아로 데려갈 수 없다는 차르의 명령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겨졌지만 엄마와 생이별한 지 1년 만에 죽었다. 공작부인 자리를 버리고 이르쿠츠크로 찾아온 마리아는 광산갱도에서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이 도시에서 학교와 고아원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의 집에서는 시낭독회, 음악회, 연극, 강좌 등은 물론이고 정치 토론도 수시로 벌어졌다. 이들 부인들의 활동으로 이 도시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계기가 됐다. 볼콘스키 부부가 살았던 집은 오늘날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되어 관광명소가 됐다. 한편 니콜라이 1세 사후 사면된 볼콘스키는 농민들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수도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준 농업과 관련된 서적으로 농촌계몽과 교육활동을 했으며, 새로운 종자들을 구해 보급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들과 고락을 같이해 농민공작으로 존경받으며 평생을 농민으로 살았다. 

이들의 순애보는 러시아 문학의 테마로도 등장한다.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에게 ‘젊은 데카브리스의 사랑’이라는 시를 헌사했고, 톨스토이는 볼콘스키 가문의 얘기를 모티브로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남겼다. 이와 같이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받은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농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젊음을 바쳤을까. 이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애국심, 지극한 인간애는 바이칼 호수의 맑은 물처럼, 이르쿠츠크의 흰 눈처럼, 우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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