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 아직도 못 다 이룬 안중근 의사의 유언
[동북아 窓] 아직도 못 다 이룬 안중근 의사의 유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남서쪽 약 230㎞ 지점 크라스키노에 가면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기념비’가 있다. 비석 상단에는 왼손 넷째 손가락 끝마디가 잘린 손도장이 아로새겨져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동지 12명이 이 일대에 모여 조국의 독립을 결의한 것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비석 주변에는 화강암 조형석 15개가 서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체포된 상태에서 안 의사가 조목조목 지적한 이토의 15개 죄목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황후를 시해한 죄, 황제를 폐위시킨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대륙을 침략해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당찼던 안 의사였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7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 후 그는 1909년 동료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혈서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적고 하얼빈 거사를 맹세한다. 안 의사는 이토가 만주지역 장악을 꾀해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재형을 찾아가 그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격연습도 한 후 여비와 권총도 지원받았다. 드디어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이었고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과 동양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복부에 권총 세 발을 발사해 사살했다. 

안 의사는 현장에서 “꼬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 말)”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돼 뤼순(旅順)감옥에 수감됐다. 안 의사는 감옥에서 1909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 15일까지 ‘안응칠(안 의사의 아명) 역사’를 집필해 탈고한 뒤 ‘동양평화론’ 작성을 시작했다. 그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싶으니 사형집행을 한 달 정도 연기해 달라고 요구해 승인을 받았으나, 일제가 이를 묵살해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범아시아의 평화’ 사상을 피력했으며, 이를 위해 한·중·일 삼국의 연합방위군과 화폐통합을 제안했다. 메이지대학 법학과 사사가와 노리카추 교수는 안 의사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유럽연합과 견줄 만한 혜안이었으며, 국제연맹의 개념을 10년이나 먼저 착안해낸 발상이었다고 극찬했다. 재판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7일부터 4일간 뤼순의 일본 법원에서 열렸고, 2월 14일에 사형을 언도받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됐다. 

안중근 의사 가문은 직계, 방계를 포함해 총 15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삼촌인 안태순 선생을 비롯해 동생 정근·공근, 사촌동생 명근·경근·홍근, 조카 원생·낙생·춘생·봉생·우생 등이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와 여동생 성녀, 조카 미생, 조카며느리 조순옥·오항선 등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가히 안 의사 일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모범적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한 가문 중 하나로 한국사에서 값지게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행히 지난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북한과 공동으로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일제는 안 의사가 순국 직전까지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원본마저 은닉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유해를 우리나라로 송환하고, 그가 남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원본을 찾는데 온 국민적 힘을 결집해야 하겠다. 안 의사가 “내 뼈를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남긴 유언이 하루속히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